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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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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한국 사회는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를 워낙 압축적으로 처리해 왔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연명치료의 중단과 존엄사 문제도 뒤늦게 압축적으로 겪고 있다.

미국 뉴저지주 대법원은 1976년 식물인간 상태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던 카렌 퀸란에게 치료 거부권을 인정하고, 호흡기 제거를 허용했다. 그녀가 “나는 호흡기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고 친구에게 말한 것을 근거로, 법원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보호자가 이를 대신하는 것을 인정했다. 물론 환자와 보호자의 이해가 상반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이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지만 바로 사망하지 않고 10년을 끌었다. 개인의 생명에 관한 판단을 너무 쉽게 한 법원의 경솔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미국 사회에서 높았다.

그리고 14년 후 낸시 크루잔 사건이 발생했다. 퀸란 사건의 영향을 받은 미주리주 대법원은 환자의 의사를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영양 공급 중단 조치를 불허했다.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크루잔은 유명해졌다. 그녀의 결혼 전 성(姓)이 데이비스라는 것이 알려졌고,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낸시 데이비스가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실을 증언했다. 신뢰할 수 있는 증인들이 나서자 가족들은 패소한 사건을 연방 대법원에 상고했다.

연방 대법원은 연명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다른 보호자가 아닌 본인의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퀸란에 대한 판결에 비해 훨씬 엄격하고 명확한 본인 의사 확인 절차를 요구한 것이다. 이듬해 연방 의회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법률이 탄생했다. 환자의 의사를 문서 또는 구두로 표현토록 해야 하고, 이것이 없을 경우 병원 윤리위원회를 설치해 환자의 의사 표명과 의학적 상태를 집단 검증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다. 퀸란과 크루잔 덕분에 미국 사회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해 발전된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미국보다 늦긴 했지만 지난 1년 동안 미국이 30여 년 동안 발전시켜온 논의를 압축하는 예지를 보여줬다. 김 할머니는 보호자들과 함께 원고 대리인을 통해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1심 재판부는 어렵게 기념비적 판결을 내렸다. 병원은 윤리위원회를 폭넓게 구성해 논의의 외연을 넓히는 한편 대법원으로 직행하는 비약상고를 통해 대법원의 신속한 판결을 받고자 했으나 결국 고등법원으로 가게 됐다. 고등법원은 가능한 한 짧은 기간에 1심에 비해 논리적으로 향상된 판결을 내려줌으로써 최종 결정은 대법원 상고심으로 넘어갔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배당하고, 공개변론까지 하면서 우리 사회 법조 지성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자기결정권과 본인의 중단 의사를 인정했다.

김 할머니는 김 할머니대로 한국 사회에서 기념비적 판결이 완성되도록 살아서 기다려 주셨다. 그리고 호흡기를 제거했는데도 바로 돌아가시지 않고 생존함으로써 논의를 확장시키라는 메시지를 던지셨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한국 사회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죽음 맞이 양식을 만들어 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버나드 쇼의 비문엔 “우물쭈물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적혀 있다. 당하는 죽음보다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개개인의 마음가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제도 마련에 우물쭈물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은 평상시에는 예의나 체면 때문에 내면을 감추고 있다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준비 없이 내면을 드러낸다. 또 한국인의 죽음관은 평소보다 불치병 진단을 받고 병실에 누워 있을 때 훨씬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위기를 맞으면 일생 동안 외부에서 주입된 사유를 떨치고 자신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같다. 언제 어떤 사고가 닥치거나 어떤 질병에 걸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의 순간을 상상해 보고 나는 그 시점에 어떤 사람들과 어떤 모습으로 죽어가고 싶은지, 그리고 나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기를 원하는지 미리 고민해 보고 이를 적어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전 의사결정서를 작성하자는 말들이 나오고,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법안도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김 할머니 한 분의 죽음 과정이 우리 모두에게 준비할 기회를 주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 드리며 하느님의 은총이 김 할머니와 함께하기를 빈다.

손명세 연세대 교수·예방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