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배짱, 이 땅의 날개를 달다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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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창업주인 조중훈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조양호 회장(맨 왼쪽)이 제작 중인 항공기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박정희 “적자 항공사 사주시오”, 조중훈 “알겠습니다” #조양호, IMF와 9·11 때 “기회다, 비행기 사라” #새 연재 | 그때 그 결단 - 대한항공 조중훈·조양호 회장

월간중앙▶ 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다스리기 위해서는 누구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경제·정치적 문제든, 법률적 판단이든, 각 분야와 규모와 인물의 비중에 따라, 사안에 따라 경중의 차이는 있을망정, 그 결단에 따라 그가 속한 집단의 역사가 소용돌이치고 흥망과 행·불행이 좌우됐다는 것은 불변의 가르침이다.

▶ 많은 사람이 결과에 대해서는 쉽게 논평하면서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까지 감당해야 하는 고통에 관해서는 평가에 인색하다. 결단을 위해 10년 넘게 갈등과 번민을 거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간적 판단의 과오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우리는 목격했다. ‘결단의 순간’은 비록 진통의 터널이 있었더라도 왕성한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기업을 찾아, 그때 그 순간의 결단을 내린 기록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정리한다. 좌절과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회사 사라고 해서 미안하오” - 1969년

결 단 1
“아버지를 능가하는 자식 없고, 형을 이길 아우가 없다”는 것은 <중용(中庸)>의 ‘성론(誠論)’편에 나오는 말이지만, 타계한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과 장남 조양호 현 회장이 대한항공을 경영하면서 시대와 처해진 상황은 달랐으나 심연의 질곡 속에서 외로운 선택을 해야 했던 기록에는 백과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교훈이 담겨 있다.

한진그룹이 월남전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창업 후 단 한번도 흑자라는 말을 꺼내보지 못한 대한국민항공(KNA)과 대한항공공사(KAL)를 인수해 오늘날 세계 10대 항공사로 키워냈다는 것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담장 너머로 생선 굽는 냄새만 맡아도 구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선을 잡아오기까지의 고충을 알 리 없으니, 그저 쉽게 운이 좋아 맛있는 고기를 먹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국제항공화물부문에서 4년 연속 세계 1위에 등정하고 여객부문 세계 10대 항공사로 우뚝 서는 것은 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3월로 창립 40주년이 됐지만 기업인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벤츠를 몰면서 미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하던 것이나 월남에 진출해 생살여탈권을 염라대왕한테 맡겨놓고 한국군과 미군의 모든 군수물자를 수송했던 한진의 기록은 제쳐놓고, 대한항공과 관련된 사안들만 보더라도 조 회장 부자(父子)가 내려야 했던 결단은 굽이굽이 꼬리를 문다.

사실 조 회장이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것은 순전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서였다. 물론 정부가 빚 덩어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할 만한 재력가를 찾을 때까지만 해도 조 회장을 인수자 1순위에 올려놓지 않고 있었다.

한진이 월남에서 벌어들인 1억5,000만 달러가 어느 정도인지는 1965년도 우리나라 총 수출액이 1억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짐작을 할 수 있겠으나, 정부로서는 실속보다 외형을 보고 선정하게 마련이어서 조 회장은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재계의 유력인사들을 접촉하며 인수를 타진했고,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나서서 동향인 신격호 회장을 만나 인수를 종용했다.

그러나 모두 두 손을 들었다. 당시 매년 100만 달러 이상 적자를 보던 때라 항공사 부채만 27억 원이 넘고, 납입자본금 15억47만 원에 정부 소유 주식 14억5,300만 원까지 합치면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사업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이후락 씨가 그때 만나자고 해요. 벌써 재계에는 소문이 퍼졌으니 보나마나 골칫덩어리 대한항공공사를 맡으라고 할 것이다 싶어요. 이후락 씨도 박 대통령이 만나보라고 시켰을 거야. 박 대통령은 혁명 직후부터 참모들을 데리고 내 별장에 와서 미군 친구들이 선물로 준 우리 집 양주를 거의 거덜냈을 정도니 잘 알지요. 하여간 이후락 씨를 만나니 역시 대한항공공사 때문에 각하께서 고민이 깊으시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적자가 얼마냐, 부채가 얼마냐, 그런 걸 물으면 끌려들어가는 거예요. 나를 생각해줘 고맙지만 우리도 해야 할 사업이 태산 같다고 거절했지요. 그랬더니 그이가 돌아가 보고드리지 않았겠어요? 아마 이후락 씨 성격에 보고하면서 ‘각하께서 직접 조 사장을 불러 짐 덩어리를 떠넘기시지 않으면 이제는 아무도 인수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랬을 거야, 껄껄껄….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지.

이후락 씨 만난 이야기를 했더니 중역들이 전부 반대예요. 그럴 거 아니겠어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도 적자를 내는 항공사업을 민간기업이 맡는다는 것이 보통 모험입니까? 그래서 나도 걱정 말라고, 절대 맡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그랬지. 그러나 나로서는 사실 그때부터 혼자 말할 수 없는 고민을 시작하는 겁니다. 비서실장이 왔다 갔으면 그 다음은 누구다 하는 것을 아는데, 대통령 호출이 있게 되면 ‘알겠습니다’ 아니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이것밖에 더 있어요? 딱 두 가지 대답밖에 없어요. 대통령 앞에 가서는 협상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러니 생각해보세요. 한진이 죽느냐 사느냐인데, 얼마나 피가 마르고 초죽음이 됐겠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나한테 닥친 거예요. 더구나 그때 벌써 정부가 입찰을 시켰지만 두 번이나 유찰이 된 이후이니 정부로서도 다급했고, 대통령께서도 단호한 생각을 하고 계셨을 거란 말이지요. 정말 대통령 호출이 저승사자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 말로 다할 수 없이 고민을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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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6일 김포공항에서 거행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에서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조 회장으로서는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어야 했다면 이때가 아니었을까 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항공사 인수는 부정적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분석해도 인수조건이나 환경부터 열악했다. 무엇보다 대한항공공사의 기본 항공기로는 경쟁력 자체가 없었다.

그때 대한항공공사가 가지고 있던 비행기는 DC-9 한 대밖에 없었고, 그나마 프로펠러기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종을 들여와야 경쟁력이 있겠지만 비행기를 들여올 자금도 문제였다. 대부분의 항공사가 정부 보증으로 비행기를 구입하지만 그것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정부가 보증해도 보증서는 은행 이름으로 나가는데, 1960년대에 어느 나라에서 한국의 은행을 신용하겠는가?

또 비행기를 들여온다고 해도 손님이 있겠느냐 하는 것도 문제였다. 신생 공화국의 신생 항공사에서 외국인 승객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예 글렀고, 내국인으로 채워야 할 텐데, 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수준이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무슨 돈이 있어 비행기로 여행을 하거나 해외에 나갈지 도무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초창기 항공산업의 실태가 이 정도였다. 결국 국민이 돈이 없으니 제트 여객기를 사와도 탈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문제, 또 돈이 없기 때문에 당장 비행기를 어떻게 사오느냐 하는 문제.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충족되면 조 회장도 결심하기가 쉬웠을 테지만, 나라에도 돈이 없고 국민도 돈이 없으니 정말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박 대통령이 불러요. 중역들은 더 난리가 났어. 우리 부회장(조중건)은 그거 맡으면 월남에서 번 돈 몽땅 손 턴다고 말이야. 손만 터는 게 아니고 한진상사까지 날린다고 아예 배탈났다 하고 만나지 말라는 거야. 껄껄껄…. 하여간 대통령을 만났는데, 긴 말씀이 없어요.

‘큰 짐을 맡겨 미안하지만 조 사장밖에 대한항공공사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조 사장이 좀 키워주시오, 정부를 좀 도와주시오.’ 이게 전부예요. 다른 것은 불필요한 이야기야. 거기서 못한다고 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하고 나왔지요. 그때가 1968년인데, 그때부터 협상을 해서 1969년 3월1일 정식으로 KAL을 한진이 인수하고 창업했지만, 나는 그렇습니다. 굉장한 결단이 필요했어요. 그러나 결정하면 그 순간부터 성공할 수 있는 방향만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될 수 있는 지혜가 나오지, 될 수 없다는 머리에서는 될 수 있는 길이 절대 나오지 않는 것 아닙니까? 박 대통령 만나고 돌아오니 전부 말을 못하고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딱 그랬어요.

‘하늘에도 길이 있다. 우리가 길에서 사업을 했고, 길에서 회사를 키웠고, 바닷길도 그렇듯이 모든 사업이 길과 함께했는데 하느님이 하늘길도 개척하라고 선물을 주셨으니 열성을 다해 일류 항공사로 키워봅시다’ 이 말이 전부였어요.”

조 회장도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너무 공허하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인수 7개월 만에 사이공 노선을 개설하고, 대한항공 비행기로 장병과 기술자들을 실어 나를 때는 정부도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5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돼있는 정부 불하금 15억 원을 거치기간 5년이 끝나자 10년까지 갈 것도 없이 일시에 갚아버리자 그때는 박 대통령이 보고받다 직접 조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수완이 그렇게 좋아요” 하더라는 것이다. 대한항공의 시작은 이러했다.

“우리가 꼭 10년이 되는 1979년 3월 우리 항공기로 뉴욕까지 운항하는 역사적 기록을 세웠습니다. 항공사업이라는 게 말이지요, 일반 공장 같으면 많이 투자해봐야 한 2억~ 3억 달러면 뒤집어쓰잖아요? 딱 20년이 되는 시점에서 보니 우리가 75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나와요.

그러니 이건 투자사업이면서 특히 사명감이 없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정말 ‘특이한 사업영역’이에요. 아이스크림 장사처럼 계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손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365일 긴장해야 하고…. 되돌아보면 어느 한 철도 마음 편하게 골프 한번 나가지 못했다 싶고 말이지. 대한항공이 그냥 성장한 게 아닙니다. 껄껄….”

대한항공의 성장과정은 마음 편하게 골프 한번을 나가지 못했다는 말 속에 녹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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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1969년 대한항공공사 사장 임명장을 받고 선서하고 있다.

성난 프랑스 달래려 “에어버스 6대 사줄게” - 1975년

결 단 2
한국과 프랑스가 단교 위기까지 갔을 때 조중훈 회장이 정부의 특명을 받고 응어리진 양국의 가슴을 녹이는 역할을 했던 이야기 역시 그의 과감한 결단이 아니면 10년이 흘러도 결코 풀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조 회장은 “세계 무대를 누비는 항공사 대표라면 월급도 없는 민간 외교관이 되어야 한다”며 겸손해 했다. 한국이 처음 지하철을 건설할 때의 이야기다.

한국 정부는 당초 서울지하철을 계획부터 기술, 차량 선택과 건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로젝트를 프랑스에 의뢰했다. 프랑스는 이미 1898년에 지하철 건설을 시작해 1900년 최초 10㎞ 구간을 개통했다. 그런 만큼 기술력은 전 세계에서 선두였다.

그런 이유로 1971년 착공해 1974년 8월15일 서울역~청량리 간 7.8㎞를 개통한 서울 지하철은 건설 계획을 세운 1970년도부터 프랑스 자문을 받아 진행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집권당인 공화당이 정치자금과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파트너를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급선회하면서 폭발했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이미 프랑스로부터많은 정보와 기술적 자료를 챙긴 것이 사실이었다. 일본의 경우 도쿄(東京)는 1931년, 오사카(大阪)는 1933년, 나고야(名古屋)는 1957년에 지하철을 개통했지만 프랑스에 비하면 후발이었고, 기술면에서도 일본이 프랑스를 능가한다고 볼 수 없었다.

프랑스의 감정은 극에 달했고 사태는 심각했다. 한국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배신감으로 단교를 검토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서울지하철이 개통되고 1년 후인 1975년, 한국이 북한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을 반대할 때였다. 결국 한국이 반대하자 북한의 가입을 묻는 회원국들의 표 대결이 벌어졌다.

그런데 프랑스가 뜻밖에 북한을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한국으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프랑스가 등을 돌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남북대결에서 패할 경우 유엔이라는 외교무대에서 단순히 체면 손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체제와 이념 대결에서 밀렸다는 것으로까지 해석하던 시절이었다.

사태는 매우 심각했다. 이때에 특명을 받은 것이 조 회장이었다.“매년 남북한이 국제기구에서 표싸움을 하던 시절 아닙니까? 그런데 지하철 사건을 프랑스는 잊을 수 없는데, 한국 정부는 홀딱 잊어버린 것이지요. 사흘만 지나면 잊어버리겠지 하는 것은 한국식 기억상실증이지, 프랑스도 그래요? 껄껄껄….

문제는 프랑스가 1표가 아니라 17표라는 것이지요. 프랑스 식민지였던 나라까지 합하면 17표란 말입니다. 프랑스가 지금도 그 표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식민지를 독립시켜줬지만 그들 나라가 프랑스에 의존하지 않고는 유지가 안 돼요. 세네갈 같은 나라에는 프랑스가 1년에 수십 억 달러를 원조해줍니다.

그게 프랑스 스타일이에요. 교육도 전부 프랑스식으로 시켜요. 프랑스 문화지요. 그게 무서운 겁니다. 무기보다 무섭죠. 나는 그렇게 봅니다. 우리가 서울올림픽 유치했을 때도 프랑스 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된 거예요. 그것 없었으면 안 됐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여간 그랬는데, 당시 김종필 총리가 불러 갔더니 큰일났다는 겁니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격이 됐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자기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악화돼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나보고 해결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JP는 정부에서 하는 일이 꼭 이렇게 당해봐야만 정신을 차린다고 했다가 말해 놓고 보니 자기가 총리니까 껄껄 웃더라고 했다.

“난데없이 특명을 받은 거지요. 참 고민됩디다. 거절하려니 정부 얼굴이 만신창이가 될 것 같고, 내가 나서자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손해가 클 것 같고…. 결국 정부의 부탁이니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나서봐야겠다 해서 퐁피두 대통령을 만났어요. 그래서 에어버스 6대를 사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지요.

그 바람에 우리가 처음 프랑스에서 에어버스 6대를 구입했어요. 에어버스는 비행기입니다. 에어버스 한 대에 그때 돈으로 2,300만 달러였는데, 그걸 우리가 사줬으니 퐁피두 대통령도 체면과 명분이 섰지요. 하여간 국가문제를 해결할 때는 특히 더 신경이 쓰이고 깊은 고민과 결단이 필요한데, 그나마 대한항공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해결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의 일이 인연이 되어 조 회장은 프랑스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레종도뇌르 그랑오피시에 등을 수훈하기도 했지만, 2002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30여 년간 한·프랑스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글 이 호 월간중앙 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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