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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 독종’이 여당 설거지를 시작했다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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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오랫동안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며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한 장광근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덕분에 대중에게 독하고 강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런 그에게 갈등의 최고점에 달한 한나라당의 분열을 수습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저격수가 당 내조에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장 총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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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근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내정설이 언론에 나돌 때 ‘친이명박계 인사’라는 말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최근에는 이재오 한나라당 전 최고위원과 인연까지 부각돼 아예 ‘친이재오계’라는 명칭까지 더해졌다.

단골 저격수의 파격 변신 … 최악의 내부갈등 수습할까 #정치인 탐구 - 장광근 한나라당 신임 사무총장

장 총장의 임명이 이 전 최고위원 복귀의 신호탄으로 해석되는 분위기다. 6월11일에는 친박 성향의 이성헌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이 “박희태 대표가 사무총장은 친박 정갑윤 의원을 추천했지만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거부했다”는 말까지 했다.

계파 간 견제가 극심한 지금 상황의 단면을 보여주는 셈이다. 당내 소통을 책임져야 하는 장 사무총장의 어깨가 무거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의원총회가 길어져 약속시간보다 15분 정도 늦은 그의 얼굴에서 피로한 기색이 엿보였다.

“쉬운 이야기부터 합시다.”

그래서 급한 질문들을 제쳐둔 채 그의 정치입문 사연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 총장이 정치판에 들어선 이야기에는 사연도 많고 질곡도 깊다. 경동고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것이 1974년의 일이다. 과대표를 맡았던 2학년 시절 유신철폐 시위를 주도하다 군대에 징집됐다.

괴로웠던 것은 수사기관의 고문도, 최전방 복무도 아니었다. 학사징계로 제적돼 제대 후에도 복적되지 않았던 것이다. “유신 말기, 엄중한 시국이었죠. 제적당한 학생들은 대부분 복학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저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제대 후 낭인생활을 하게 된 거죠.” 놀고만 있을 수 없어 가방 제조공장에 취업했다.

이 회사가 부도난 후에는 중장비 무역 중개업체에서 일했다. 해외에서 들여온 건설 중장비를 직접 시운전했기 때문에 국토해양위 소속인 지금에 와서도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된다며 웃어 보인다. 그러는 와중에 10·26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덕분에 장 총장의 학생 신분도 회복되는가 싶더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등장하며 다시 제적 상태가 됐다.

결국 1986년 가을학기가 돼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입학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장 총장이 본격적으로 정치·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서다. 6·29선언으로 직선제가 도입되기는 했지만 군사정권의 바통을 이어받은 노태우 후보 대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이른바 3김의 대결. 야당 지지표가 뿔뿔이 갈라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시위 주도하다 붙잡혀 13년 만에 졸업

“단일화를 위한 정치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16명 정도의 뜻있는 사람이 모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이라는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결국 막판에 단일화가 물거품되자 ‘민민사’ 사람들도 각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죠. 저를 비롯한 몇 명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었습니다. 유인태 전 정무수석, 원혜영 의원, 김부겸 의원 등이 함께했죠.”

1988년 총선에서 장 총장은 동대문갑 지역구에 출마해 모두의 예상대로 장렬하게 ‘전사’했고, 당도 흩어져 버렸다. 이후 두원산업상사라는 설비제품회사를 차려 사업에 열중하기도 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노태우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만드는 것을 보고 다시 정치로 눈을 돌렸다.

“3당 합당에 따르지 않은 민주당 잔존세력과 평민당이 합당했는데, 이 통합민주당에 제가 몸을 담게 됩니다. 이기택 전 총재 비서실장을 하며 최측근으로 일했죠. 그런데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복귀하면서 다수의 DJ계 의원이 빠져나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습니다. 탈당한 사람들의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받아 제가 14대 국회의원이 된 것이죠. 현대정치사의 질곡 속에서 온전치 못한 반쪽짜리 국회의원이 된 겁니다.”

15대 총선에서 약소정당인 ‘꼬마’ 민주당으로 출마했지만 또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이후 대선을 앞둔 이회창 총재가 손짓해 민주당은 신한국당과 합당하고 한나라당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 총장은 1997년부터 한나라당 수석 부대변인을 맡아 김대중 정권과 부닥치는 최전선에서 일했다. 김 전 대통령 측근의 비리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선봉에 서 있던 그때, 그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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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이었습니다. 기자들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삐삐’가 와 전화를 거니 소방서예요. 우리 집사람 이름을 대며 아는 사이냐고 묻더군요. 지금 위중한 상태인데 병원에 있으니 빨리 가보라는 겁니다.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아내가 MRI를 찍고 있는데 고통을 못 이겨 막 소리지르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막내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부인이 집에 돌아와 불을 켜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큰 충격이 왔다. 군복을 입은 거구의 남자였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군홧발로 걷어차는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아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순간 부인은 몸을 던져 이를 막았다. 대신 온몸에 자상을 입어야 했다. 얼굴의 뼈가 짓이겨지고 갈비뼈가 모두 부러지는 중상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장 총장의 눈이 붉게 젖어 들었다.

“나름의 신념에 충실하고 소신 있게 살았는데 당해도 내가 당해야지 왜 내 가족이 피해를 받아야 하나 싶었어요. 현역 의원도 아니고 수석부대변인 시절이었습니다. 너무 어려운 시기였죠.”

3년간 열 번의 대수술을 거쳐 많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부인에게는 후유증이 남아있다. 가족이 폭행당하는 처참한 상황까지 접했지만 그 못지않은 시련이 또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분기탱천해 장 총장이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던 중 이회창 총재의 개인문제들을 향해 또다시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가족에게 가해진 폭력, 정치에 회의감 느껴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당의 간곡한 요청에 장 총장은 지역구를 포기하고 총선 선대위 대변인을 맡게 됐다. 전국구 배정을 기대해 보라며 당 관계자들이 그를 달랬다. 그러나 전국구 배분 후 그에게 주어진 번호는 24번, 당선권 밖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원망하는 심정보다 먼저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집에 들어갈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때 마침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당신 볼 낯이 없다’는 제게 아내는 ‘당신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라며 위로하더군요.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잠시 강원도로 내려갔는데 또 당에서 연락이 와요. 결국 괴로운 가슴을 안고 다시 대변인으로 섰습니다.”

앞 번호 전국구 의원이던 황승민 전 의원이 작고해 2003년 2월 의원직을 승계받았다. 1년의 짧은 의정활동을 하며 17대만큼은 거의 평생 살아온 동대문구 지역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민심은 이미 한나라당을 떠나가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정국이 발단이었다.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제가 자주 등장하다 보니 미운 놈이라고 욕도 먹고, 우리 당 지지자들은 ‘토짱’이라는 별명도 붙여주셨죠. 탄핵안 발의를 앞두고 의원들과 함께 농성하는데 MBC 토론 프로그램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원래 한나라당 참석자가 정해져 있었는데, 탄핵에 대한 역풍이 슬슬 감지되다 보니 발을 빼버렸다는 거예요. 안 나오면 한나라당이 책임감 없이 빠져 토론이 파행됐다는 자막을 내보내겠다더군요. ‘에라, 모르겠다’하고 나갔습니다.”

탄핵정국이 불러온 역풍에 장 총장도 날아갔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 말 때문에 탄핵의 주범처럼 몰린 것이다. 17대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또 낙선했다.

박미소 월간중앙 기자 smile8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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