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9/11은 21세기 가장 쇼킹한 폭로?"

중앙일보

입력

화씨 9/11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미국의 가진 자들이 손잡고 각종 사악한 수단을 동원해 미국의 평범한 국민들을 비롯한 전 세계인을 착취하고 괴롭히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주장과 전반적인 내용의 힘을 빌려 미국인들이 선택해야 할 길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은근히 역설한다. 그리고는 이 영화의 내용은 '21세기 가장 쇼킹한 폭로'이며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할 때 이 영화는 '21세기 가장 쇼킹한 폭로'와는 거리가 멀고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라고 볼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집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반(反)공화당 주의는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반미주의자들이 주입하려고 노력해왔던 터라 이제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이 영화는 반미주의자들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즐거울 수 있는 영화다. 평소 미국의 '추악한 이면'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한편으로 부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신랄하게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반미주의자들에게 즐거움만 안겨줄 뿐 근본적인 미국의 문제해결에는 별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느껴지는 '왜?'라는 의문에 대한 심층적인 해답이 없거나 전적으로 부시 대통령과 미국 부유층들의 책임인양 나와 있다.

가령 미국은 테러의 위협을 알면서도 왜 해안지역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는 것일까? 왜 미국은 부상병사에 대한 보훈 혜택을 줄이고 있는 것일까? 부시와 공화당의 잘못을 비판하는 서적과 자료들이 수없이 많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에서 공화당의 지지율이 높은 이유에 대한 다방면의 분석과 해답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냥 단순히 그 모든 이유가 부시와 공화당의 잘못과 탐욕 때문이라고 몰아세우고 있을 뿐이다. 뭔가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총기 소유가 자유화되어 있다. 화씨 9/11 식의 논법으로 해석하면 이는 미국 총기 제조업체들의 가진 자들에 대한 로비에 의한 결과에 불과하며 결국 가진 자들과 총기 제조업체들의 이권을 위해 대중들이 희생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미국에서 총기 소유가 자유화되어 있는 것이 순전히 총기 제조업체들과 가진 자들과의 유착 때문일까? 광활한 미국의 영토, 그리고 그 영토 안에 흩어져 사는 수많은 미국 국민들의 안전을 가장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총'이기 때문에 굳이 총기 소유를 자유화시키고 있다는 이유는 제기될 수 없는 것일까? 철저히 화씨 9/11은 외눈으로 세 상을 보는 듯한 경직된 맹목적인 반(反)부시 노선을 대중들에게 다큐멘터리와 간간이 나오는 유머를 빌어 주입하고 있을 따름이다.

필자가 이 영화를 냉정히 비판하면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미국이 노출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라고 본다.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주장까지 빌려가며 미 대선에서 민주당이 대안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필자는 회의적이다.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전쟁은 계속 될 것이고 미국의 일부 잘못된 행동은 계속 될 것이며 UN 운영 지원과 같은 범 세계적 의무에 대한 미국의 발뺌은 계속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발생하도록 만든 시스템은 탓하지 않고 사람만 탓한다. 다시 말해 이는 반미감정에서도 그래도 이어진다. 미국의 이기적인 행동을 만들어 내고 있는 범 세계적 구조, 그리고 미국 내부의 구조를 수정하려는 고민과 노력은 하지 않고 오로지 반(反) 공화당의 구호만 소리 높여 외친다.

반미(反美)의 목표가 진정한 세계 대중들의 행복이고, 정치적 계산이 뒤로 미뤄져 있다면 우리 사회 반미주의자들은 화씨 9/11이나 보면서 공화당과 부시 대통령을 조롱하기에 앞서 근원적인 세계의 구조를 어떻게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바꿀 것이며 이를 공화당과 부시 대통령과 같은 자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지, 혹은 꼼짝 못하게 굴복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마디로 화씨 9/11이란 영화 전반에 흐르는 '비웃기' 식의 반미는 고작 우리 사회 '보수'라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경직된 냉전논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부시 대통령이 9.11 테러 이후 민항기 이착륙이 전면 금지된 상황에서 빈 라덴 친인척들을 사우디로 전세기를 태워 보냈다는 것은 잘못된 내용이라고 한다.

미디어오늘에 김남두 씨가 기고한 글을 보면 '최근 9.11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일단의 사우디 인들이 전세기를 이용해 본국으로 떠난 날짜는 9월 14일인데, 이 때는 이미 민간항공사의 운항이 재개되고 다만 전세기의 비행 금지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빈 라덴 일족이 탄 전세기가 실제로 미국을 떠난 것은 이보다 뒤인 9월 20일이라는 것'이란 설명이 나온다.

부시가 빈 라덴의 친인척들을 여객기 이착륙이 전면 금지된 상황에서 빼돌렸다는 식의 왜곡된 폭로들은 마치 구태의연한 일부 한국 '보수'의 현실성없는 색깔론을 연상시킨다. 가령 과거 열린우리당 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반미, 친북주의 노선에 경도되었던 적이 있어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치부하는 것 같은 행동이다.

현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인 박영배 씨가 쓴 '게이 레즈비언부터 조지 부시까지'라는 책을 보면 민주당이나 공화당 모두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집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워싱턴 시민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워싱턴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다만 영원한 이익관계가 존재할 따름이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에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 실제로 미국 사회에서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영화가 제기하는 식의 문제제기 방식으로는 미국의 문제는 개선되기 힘들 것이며 민주당이 미국의 대안이라는 식의 주장은 이 영화 역시 결국 또 다른 형태의 '할리우드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92년 미 대선에서 민주당 클린턴 후보는 1억 3천만 달러, 공화당 부시 후보는 9천만 달러의 선거 비용을 지출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결국 민주당을 선택하건 공화당을 선택하건 지금의 미국의 본질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말로 미국의 일부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고 국제 사회의 의무를 지킬 줄 아는 패권강국 미국을 만들기 위해 미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북한 인권의 비참함과 근본적인 한국 전쟁에서의 북한 집권세력의 책임 등 북한의 모든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화해와 협력의 길을 열기 위해 그들과 함께 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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