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 칼럼]장관 길들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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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보도에 따르면 요즘 정보통신부 직원들은 개인휴대통신 (PCS) 사업자 선정과정의 비리를 검찰에서 털어놓는 LG와 한솔 두 업체에 대해 불만이 대단하다고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LG에 대해서는 돈을 줬다는 사실을 검찰에서 진술했으면서도 사후에 귀띔도 해주지 않아 피해가 더 컸다며 "두고 보자" 고 벼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직원들은 이번 사건에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지 정통부 전체 분위기가 그렇다거나 더 나아가 공직사회 전체가 이런 식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일부 직원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을 명백한 비리가 드러났는데도 반성이나 수치심을 느끼기는커녕 사실을 털어놓는 업자측을 원망하고 "두고 보자" 며 벼르기까지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또 일부 관리들은 재정경제부에서는 국장 한 명만 구속됐는데 정통부에서는 차관.실장.국장이 줄줄이 구속된 것을 놓고 이런 경우에 바람막이를 해줄 인맥이나 안전장치가 든든하지 못한 탓이라고 한탄하고 있다니 어처구니없다.

비리사건이 터져도 관리들이 고작 이런 식의 반응이나 보이고 만다는 사실 자체는 일선 기자생활을 통해 익히 경험한 바라서 그렇게 놀랍지는 않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공직사회의 풍토는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인 것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절망감마저 느끼게 된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최근 일부 장관들의 부처장악력이 형편없어서 경질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장관으로서의 식견이나 자질이 모자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면 바꾸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물론 없다.

그러나 단지 '장악력' 이 주된 이유라면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경질소문 자체가 관리들이 하고 다니는 불평.불만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자신들의 비리에 대한 충분한 보호막이 돼주지 못한다는 불만, 부처이기주의를 극대화하지 못한다는 불평, 이런 것들이 '장악력 부족' 의 실질적 내용이라면 바꿔야 할 것은 장관이 아니라 불평.불만을 지닌 관리들일 것이다.

장관이 새로 부임하면 노회한 고급공무원들이 은근히 요구하는 게 있다.

그 첫째가 대통령과 독대 (獨對) 기회를 자주 가지라는 요구다.

"독대할 만한 거리,점수 딸 만한 거리는 우리들이 만들어 드릴 테니 어떻게 하든지 자주 만나십시오. 그래야 장수하십니다" 하는 식이다.

장관을 위하는 말 같지만 실은 그렇게 해서 개인적으로는 장관에게서 신임도 얻고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보호막도 마련하자는 것이다.

또 한가지 노회한 관리들이 신임장관에게 들이대는 것은 예산을 많이 따 오라는 요구다.

그들에게는 국가전체의 경제사정은 둘째문제다.

자기부처.자기소관의 예산을 많이 확보하는 게 급선무이고 그를 위해 장관이 능력을 보여 줘야 마땅하다는 말을 마치 장관을 위하는 것처럼 해댄다. 실제로 공무원사회에서 장관의 힘과 능력은 바로 그것들에 의해 저울질된다.

따라서 독대를 자주 하고 예산을 많이 따 오기만 하면 행정능력이야 있건 없건 강한 장악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에는 큰 관심없이 행정업무나 충실히 수행하려 들면 아무리 업무능력이 뛰어나도 관리들이 제대로 충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정권들에서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행정을 하려 했던 장관들이 공통적으로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퇴임한 뒤였으며 그들의 장관수명도 대개는 길지 않았다.

정통부 직원들의 비리사건에 대한 반응과 불만내용을 뜯어 보니 이기적이고 노회한 고급관리들의 장관 흔들기, 장관 길들이기는 그 뿌리가 더 굵어진 것 같다. LG에 대해 "두고 보자" 고 했다는데 절대로 괜한 소리가 아닐 것이다.

최근 연구기관과 공기업의 구조조정작업이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는 것도 개혁자들이 공직사회의 풍토와 기질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지난 정권때 그렇게 많은 개각이 이뤄진 원인이 인선 잘못에만 있다고 보지 않는다.

장관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놀아난 탓도 크다.

손쉽게 장관만 갈 것이 아니라 이번만큼은 결연한 자세로 이기적이고 노회한 공직자들을 갈아 버려야 한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유승삼(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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