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지나간 자리에 색색의 꽃이 핍니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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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경희씨가 만든 연잎 모양의 차 보자기. 찻잔과 주전자 등이 식지 않도록 덮어놓는 모시 보자기다. 손잡이 역할을 하는 연꽃 옆에 작은 나비를 앉혔다. [정경희씨 제공]

색마다 기운이 있다. 침선 공예가인 정경희(56)씨의 작품을 보면 강해지는 믿음이다. 그의 바늘은 가는 곳마다 색을 틔워낸다. ‘꽃신들의 행복 이야기’라고 이름 붙인 꽃신들은 각기 다른 조합으로 염색된 천을 붙이고 함지박 안에 가지런히 늘어섰다. 오행(五行)의 기운과 각각 연결된 적(赤)·청(靑)·황(黃)·백(白)· 흑(黑)의 기본색이 균형을 이룬다.

꽃신들이 원을 그리고 있는 함지박에는 유리를 얹어 탁자로 쓸 수 있다. 정씨는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를 꾸며 지금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소개했다.

정씨는 지난해 버선·수저집·문살 등에 화조도·미인도·거북도 등을 수놓고 ‘바늘자리가 숨을 쉽니다’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를 열었다. 올해 전시는 ‘바늘자리에 꽃이 핍니다’로 이름을 살짝 바꿨다. 자신의 작품이 씨를 뿌린 후 꽃이 피는 시기에 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년 전시 제목에는 ‘열매’를 넣을 예정이다.

매년 전시를 여는 그는 현재 광주 수피아여고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다. 동양화를 전공하고 30년 넘게 교단에 섰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서인지 우리의 옛 문화가 잊혀지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사명감이 강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색색의 조각 천을 붙이고 수를 놓던 어머니의 추억 또한 그를 침선 공예의 길로 이끌었다. 정씨는 “어린 시절 집에 돌아오면 노랑·초록·빨강이 어우러진 상보가 밥상을 덮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 색의 향연을 열어 젖히고 식사를 하고 나면 어머니가 직접 만든 누비 이불이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있는 전통 공예 작품이 현대인들의 집에서 쓰이고 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했다.

 김호정 기자

▶24~30일 서울 관훈동 갤러리이즈. 02-736-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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