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땀에 깃든 옛 여인들의 숨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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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 11면

그의 수집 이력은 반세기에 육박한다. 허동화(83)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수집가의 꿈’이라는 박물관을 세운 게 이미 1976년이었다. 일흔이 넘어서는 화가로 데뷔했다. 옛날 옷감으로 만든 콜라주, 못 쓰는 농기구를 활용한 오브제에 조각보ㆍ자수를 닮은 아크릴 그림 등을 빚어냈다. 몬드리안이나 클레의 추상미학 뺨치는 한국의 보자기를 반세기나 만졌으니, 영감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이경희 기자의 수집가 이야기 -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 관장

“의외로 주위 평가가 좋아. 2006년 대전 아주미술관에서 전시했는데, 내 작품이 1억원어치나 팔려 깜짝 놀랐어.”
그도 처음엔 남들처럼 도자기부터 시작했다. 큰맘 먹고 산 것들 중 가짜가 많았다. 싼 맛에 금이 가거나 흠 있는 것을 모았더니 재미가 없었다.

“깨지지 않는 것, 남들이 안 하는 걸 찾고 있는데 자수랑 보자기가 눈에 들어왔지.”
우연히 해외로 팔려 나가는 ‘화조도’를 보곤 속이 끓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수에 관심이 없었고, 외국인들은 눈이 밝아 좋은 걸 알았지. 그냥 뒀다간 다 팔려 나가겠더라고.”

왕비 방석. 17세기. 왕실을 상징하는 봉황과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ㆍ목련을 수놓은 방석. 수방나인이 수를 놓아 작품 수준이 높다.

60년대만 해도 자수나 보자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짜도 없었고, 값도 쌌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70년대였다. 충남 금산에서 자수병풍을 내놓겠단 말을 듣고 달려갔다. ‘구운몽’을 수놓은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남아 있었나”라며 감탄을 했더니, 값어치를 눈치 챈 주인이 안 팔겠다고 돌아섰다. 명절이면 선물을 싸들고 찾아가길 5년을 넘게 해도 요지부동. 10년 지나 그 주인의 아들이 물려받은 병풍을 집 한 채 값 받고 그에게 넘겼다. 그렇게 3000여 점을 모았다.

“사업이란 돈을 수집하는 행위야. 자수ㆍ보자기 말고 돈을 수집했다면 거부가 됐을 거야. 그러나 돈은 위험하지.”
돈과 달리 자수와 조각보에는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 너무 습하면 썩고, 건조하면 부서지는 건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월에 베갯모 전시를 하는데, 100개 넘는 것들에 이름을 다 지어줘야 해. 그런데 그게 내가 짓는 게 아니야. ‘내 이름은 뭐다’고 작품들이 스스로 말해 주지.”
그가 낸 규방문화 관련 책만 20권에 육박한다. 해외 전시도 50번 가까이 하며 우리 문화를 알렸다. 오래 보고 연구하며 쌓인 경험적 통계는 본능이 됐다. 그는 얼마 전 TV쇼 진품명품에 자수 감정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자수에 배어 있는 곰팡내와 함께 궁중에서 쓰던 사향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궁중자수가 확실했다. 오감으로 옛 물건들과 소통하는 경지다.

“수집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뭔가를 팔아야 하는데, 제일 마지막에 파는 게 골동품이랑 마누라래.”
만약 골동품과 마누라 중 하나를 팔아야 된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되물었다.
“아마 마누라를 먼저 팔 걸. 마누라가 알면 큰 일 나는데…. 그만큼 골동품 사랑이 지극하단 뜻이지, 뭐. 허허.”

젊은 시절 한국전력 상무와 감사를 지냈다. 퇴직 후엔 조그맣게 사업도 했다. 그러나 치과의사인 아내 박영숙(77)씨가 가장 든든한 스폰서이자 동지였다. 그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한땀 한땀 정성 들여 조각보 짓듯 표현했다.

“그림 그리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 집사람 옷은 내가 전부 디자인했어. 사서 입으면 한 벌 입을 돈으로 열 벌을 지어 입으니 한 번 누릴 기쁨을 열 번 누리는 거지. 남편이 해줬다고 자랑할 수도 있고.”

요즘 그는 주중에 박물관을 돌보고, 주말엔 아내와 함께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 간다.
“나이 들수록 세상 사는 게 재미있어. 안 보이던 게 보이고, 못 느끼던 걸 느끼고, 진실에 가까운 걸 체험하니까. 그림도 젊어서 배웠다면 특별한 걸 못 그렸을 거야. 나이 들어 시작했으니 생활과 철학이 배어 더 재미있는 거라고.”
오래 묵어도 예쁜 조각보처럼, 그가 사는 모습도 곱고 예뻤다.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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