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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박정희 기념관 건립 서두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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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60년대 말부터 한적한 시골 마을이 공단으로 본격 개발되면서 고향 민심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논밭과 집이 수용돼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박 대통령을 치켜세웠고, 손해를 본 이들은 깎아내렸다. “민족 중흥의 영도자”라는 평가와 “대통령을 그렇게 오래 하면 누구라도 이 정도는 한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70년대 말 대학에 들어가니 세상에 이런 독재자가 없었다.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 속에서 우린 연일 그의 퇴진을 외쳤다. 이렇게 1년쯤 지나자 그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서거했다.

그 후 오늘까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위인과 독재자 사이를 오간다. 시기나 이념에 따라 평가는 사뭇 다르지만 기업인이나 경제 관료들은 대체로 허물보다는 공(功)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분명한 비전과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오늘의 한국을 만든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국민소득 300달러 시대 때 원자력발전소를 생각한 박 전 대통령은 참 대단한 분이다. 외국인들에게 이런 사연을 소개하면 깜짝 놀란다.” 최근 만난 공기업 사장의 말이다.

박 전 대통령과 13년간 서신 왕래를 한 재미과학자 김완희(83) 박사는 “박 전 대통령이 재계도 중요성을 잘 몰랐던 전자산업에 여러 채널을 통해 일찍 눈을 떴다”고 본지(6월 3일자 E9면)에 증언했다.

경제가 어려운 요즘 박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경제 대통령’이었던 그의 리더십이 새삼 돋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지난 60여 년 동안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 순으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적어도 산업화의 정점에 박 전 대통령이 있다는 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성장에 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복지제도의 근간도 만들었다. 부단히 정치적 외연을 넓혀 간 ‘실용주의’의 원조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이념 갈등으로 평가가 공정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하면 ‘보수 골통’이란 꼬리표가 붙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숱한 논란 속에 그의 기념관조차 짓지 못하고 있겠는가. 살아 있는 대통령의 기념관이나 기록관은 지으면서 말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경우 기념도서관과 이름을 딴 컨벤션센터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록관도 고향 거제에 짓는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던 박 전 대통령이 타계한 지 올 10월이면 만 30년이 된다. 사후에 냉엄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했으니 적어도 후손들이 둘러보고 그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공간은 두는 게 옳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은 10년째 표류 중이다. 정치적 반대편에 섰던 DJ 정권의 결단 형식으로 99년 시작한 사업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 시들해졌고 약속했던 국가 보조금마저 끊겼다. 500억원을 모금하기로 했으나 100억원에 그쳤다는 이유였다.

이런 조치가 부당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최근 나왔다. 대법원은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기부금 모금액 미달로 208억원의 국고 보조를 취소당하자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을 상대로 낸 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손을 들어 줬다.

과거 정부는 그릇된 정치적 판단과 세 차례 소송 등으로 혼란과 행정 낭비를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역대 정부가 모금 부족 운운한 것은 기념관을 못 짓게 만든 구실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업회 측은 조만간 사업계획서를 행자부에 제출하겠다고 한다. 모금을 제대로 하고 필요하면 국고도 더 지원하자.

이 기념관에 박 전 대통령의 공과를 엄정히 기록해 바람직한 대통령 문화가 뿌리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산업관·민주관·유신관·새마을관·자주국방관을 두루 만들면 역사 교과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왕 지을 바엔 가급적 서두르자. 박 전 대통령과 관계를 맺었던 많은 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는 분들도 세월이 갈수록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귀중한 자료들이 소실될 우려도 크다.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젠 끊자.

박의준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