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채윤일 연출 '영월행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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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영월행 일기' 는 이강백연극제 마지막 작품. 이 관념적인 작가가 풀어내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엿볼 좋은 기회다.

연극제에 오른 4편의 작품 중 유일하게 95년 초연 당시의 연출자 채윤일이 다시 연출을 맡았다.

신숙주의 하인이 썼다고 전해지는 고서적 '영월행 일기' 를 손에 넣은 고문서 연구가 조당전과 남편 몰래 이를 팔았다 되찾으러 온 김시향이 중심 인물. 채윤일은 남녀 주연으로 각각 '뮤지컬 배우' 'TV탤런트' 의 이미지가 강한 김민수와 정수영을 골랐다.

이들은 현실에서는 조당전과 김시향이지만, '영월행 일기' 를 펼쳐들면 이내 세조가 단종의 안색을 살피러 보낸 신숙주의 남자 하인, 한명회의 여자 하인이 돼버린다.

김시향은 정보기관의 책임자쯤으로 암시되는 남편의 소유물인 현실에서는 한껏 절제된 모습이지만, 영월로 가는 가상의 여행속에서는 헤픈 웃음을 까르르 곧잘 웃어댄다.

이런 이미지야말로 채윤일이 정수영을 고른 이유일 듯. "사랑없는 결혼은 할 수 없기에" 여태 미혼인 40세 남자 조당전으로 변신한 김민수는 자신이 '뮤지컬 배우' 이전에 '정극 배우' 로서 연기를 시작했음을 다시 확인시키려는 듯 연극적인 선이 뚜렷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책을 돌려달라며 저고리를 벗는 김시향과 오래되지 않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며 이를 물리치는 조당전의 첫만남에서 결국은 조금도 진전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만다.

세 차례 영월행의 대가로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던 신숙주 하인의 바람과 달리 현실의 김시향은 권력층 남편의 몸종같은 운명을 어찌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치의 오차없이 딱딱 들어맞게 계산된 비유적 인물들과 그 비유 안에 이미 내재된 그들의 운명은 무대의 관객보다 희곡의 독자에게 더 즐거울 것으로 보인다.

희곡의 틀이 꽉 짜이면 짜일수록 연출자의 상상력이 들어설 자리가 충분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4일까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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