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습니다] 이종찬 기자의 2009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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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09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 개막식 현장. 세계 13개국에서 학생·교사 등 1만6000여 명이 모였다. [에임스(미국)=이종찬 기자]

창의력이 요즘 키워드다. 고입·대입 할 것 없이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해 잠재력과 창의력을 측정한다고 한다. 때마침 지난달 27~30일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창의력 대회가 열렸다. ‘2009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였다. 아시아·유럽·북중미에서 13개국 787개 팀이 참가했다. 각국 학생들이 끼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창의력을 겨루는 현장을 기자가 직접 가봤다.

에임스(미국)=이종찬 기자

지난달 28일 아이오와주립대 셔먼 빌딩 벤트홀. 서울 계성초등학교 학생 7명으로 구성된 ‘하모니(HAR MONY)’ 팀이 무대에 섰다. 창작극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의 막이 올랐다.

“나는 오즈의 개장수다. 너희가 아무렇게나 키운 도도는 사실은 이 세상에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가 사자인 개다. 그래서 아주 비싼 값에 팔 수 있지….”

강아지 도도를 훔쳐간 도둑 역을 맡은 5학년 임재현(13)군이 말했다. 관객들이 숨죽이며 지켜봤다.

이날 창작극의 주제는 ‘미신’. 계성초를 포함해 각국의 팀들은 기존에 알려진 두 가지 미신과 새롭게 만든 한 가지 미신이 포함된 창작극을 선보였다. 주제를 재해석하고, 이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며, 극을 기획하는 종합능력을 심사위원들에게 평가받는 것이다.

계성초는 ‘밤에 거미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 도둑이 든다’ ‘민들레 갓털을 한꺼번에 불어 날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한국의 두 가지 미신을 재료로 삼아 ‘오즈의 마법사’ 동화를 재구성한 연극을 발표했다. 강아지 도도를 도둑맞은 도로시가 민들레 갓털을 타고 도둑에게 찾아가지만 도로시 역시 도둑의 포로가 되고, 도로시와 이모가 동시에 ‘사랑해’를 외치는 순간 무지개가 나타나 둘을 만나게 해준다는 줄거리였다. 계성초 팀은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한국의 토속적 미신과 서양의 동화를 잘 버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계성초 팀원들은 즉흥 과제에서도 탁월한 끼를 보여 줬다. 즉흥 과제는 무작위로 과일을 받아 들고 떠오르는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5학년 홍은교(12)양은 포도를 받아 들고 “My eyes are falling(내 눈알이 빠져나와요)”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계성초 ‘하모니’팀이 ‘미신’을 주제로 한 창작극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창의력교육협회 제공]

계성초 팀은 30일 폐막식에서 19개 부문별 우승팀으로 선정됐다. 제5과제를 선택한 계성초 팀이 첫날 장기 과제 점수와 스타일 점수에서 미국 뉴욕의 놀스메인 초등학교에 1.72점 차이로 뒤졌다. 하지만 대회 마지막 날 자발성 과제에서 만점과 보너스 점수까지 받으며 역전 우승한 것이다. 한국 팀이 우승한 것은 2005년 참가 이후 처음이다. 팀을 이끈 박상민 지도교사는 “아이들의 좌충우돌 아이디어를 한데 모아 스토리를 엮어 내는 게 힘들었다”면서도 “일방적으로 대본을 만들어 외우게 했다면 그만큼 풍부한 표현력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창의력이란=올해 30주년을 맞은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에서는 과학적 창의력, 언어적 상상력, 인문학적 감수성, 기획력, 팀워크, 리더십 등을 평가했다. 이를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5개의 장기 도전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교통수단을 직접 제작해야 하는 제1과제에서는 네 가지 환경에 따라 변신하는 자동차를 만들고, 그 자동차가 출현하는 연극을 창작해 발표해야 한다. 제5과제에서는 정해진 목재와 접착제 등 제한된 조건에서 가장 많은 무게와 충격을 버티어 내는 구조물을 제작해야 한다.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에서는 팀워크와 리더십도 중요한 평가 요소다. 특히 현장에서 주어지는 자발성 과제에서는 2명의 팀원이 자발적으로 과제 수행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팀워크를 평가했다.

대회 창시자 새뮤얼 미클러스(75·미국 로앤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과제를 수행하는 학생들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과 인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를 배운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미클러스 교수의 창의력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만 무려 4000여 개나 된다. 오클라마호에서 온 학부모 패티 스월트(42)는 “창의력 교육은 아이의 성장에는 물론 입시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국내 창의력 교육은 미국 등 세계 선진국들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소수의 영재나 대회 참가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감당한 여유가 있는 학생들만 창의력 교육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대표팀을 인솔한 한국창의력교육협회 황욱 회장은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해 창의력 교육을 공교육에서도 점차 확대해야 한다”며 “좀 더 많은 학생에게 창의력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주기 위해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 창의력대회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에 한국에서 참가한 25개 팀 중 제4과제의 서울 방이초가 4위, 제3과제의 창원 신월초가 7위 등에 입상했다.

대회는 끝났으나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학생들이 모여 사귀는 사교의 장은 이어졌다. 캠퍼스 곳곳에는 각 국가와 주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진 배지 모양의 ‘핀’을 교환하기 위한 시장이 수시로 열렸다. 주최 측은 서로 다른 국가의 팀들끼리 ‘버디팀’을 맺어줘 서로 경기를 응원하고 파티도 여는 등 우정을 나눴다. 미국 오클라마호주에서 온 베일리 셸던(13)은 “이곳에서 사귄 한국 친구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 무엇을 평가하나?

▶장기 도전과제(Long term problem)
▶즉흥 과제(Spontaneous problem)

※1년 전 출제되는 5개의 장기 도전과제별로 예선을 거쳐 국가별과 주별(미국) 대표 선발. 결승에서는 장기 도전과제와 현장에서 주어지는 즉흥 과제를 동시에 평가해 최종 순위를 결정. 과제별로 비용과 시간제한이 있으며, 나이에 따라 4개 부문(Ⅰ~Ⅳ)으로 나눠 경쟁.

세계 학생 창의력 올림피아드(Odyssey of the Mind)= 미국 로앤대 새뮤얼 미클러스(산업디자인과) 교수가 고안해 1978년 처음 시작된 창의력 경연대회. 첫해는 뉴저지주의 28개 팀만 참가한 지역 대회였으나 현재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1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의 창의력 대회로 성장했다. 매년 미국 메릴랜드대, 아이오와주립대, 미시간주립대가 돌아가면서 개최하며, 세계창의력협회(Creative Competition, Inc.)가 자격을 부여한 5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대회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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