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에세이]'작은 역사'도 기록하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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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도쿄 (東京) 를 가로지르는 간다 (神田) 강의 한쪽에는 신에도가와바시 (新江戶川橋) 공원이라는 작은 쉼터가 있다. 공원 초입에 서있는 오이 겐도 (大井玄洞) 의 흉상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있다.

인명사전에도 안 나오는 무명인물로, 흉상도 실물 크기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안내 동판 (銅版) 을 꼼꼼히 읽어야 알 수 있다.

'1852년에 태어난 오이는 18세에 도쿄로 이사와 포목행상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여름 장마철마다 강물 범람으로 이웃주민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사재를 털어 제방을 쌓기 시작했다. 이웃들과 힘을 모아 18년에 걸친 공사 끝에 오늘날 간다강의 양안 제방이 완성됐다.

' 감복한 주민들이 공로비를 세우려 했으나 극력 반대하다 그가 70세 되던 해 '작게, 그리고 안 보이는 곳에' 세운다는 조건으로 흉상을 제막했다. 도쿄 시내를 거닐다 보면 이런 작은 역사의 현장을 쉽게 발견한다.

얕은 언덕길 하나에도 옛날의 역사가 일일이 동판에 기록돼 붙어 있다. 도쿄 간다역 부근에 있는 이즈모 (出雲) 국수집. 허름한 이 가게의 장부에는 지난 1백년간 일본식 국수 (そば) 를 먹고 간 유명인물들과 그들이 어떤 국수를 얼마나 시켜먹었는지를 빼곡이 적어놓았다.

도쿄 롯폰기 (六本木) 의 허름한 닭구이집이나 네즈 (根津) 의 좁은 전통 붕어빵집에는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먼데일 전 미국부통령 등이 가게에 들러 맛있게 음식을 먹는 사진이 자필사인과 함께 벽에 걸려 있다. 그런 가게에까지 일부러 찾아드는 외국 유명인사들의 범상치 않은 식도락과 이를 놓치지 않는 가게주인의 기록정신에 놀랐다.

모두 작은 역사의 현장들이다. 얼마전 함께 산책을 나간 유치원생 아들이 느닷없이 "아빠, 나는 오이같은 사람이 될래요" 라고 했다.

신에도가와바시 공원에 소풍을 왔을 때 일본인 선생님이 오이의 흉상으로 데리고 가 "이 분은 좋은 사람이에요" 라고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본의 힘이 어디서 출발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도쿄=이철호 특파원〈leechul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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