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 때 사회적 책임 다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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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35면

세계 금융위기가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사회나 환경을 살리기 위해 나섰던 많은 기업이 이제 자기 자신을 먼저 살려야 하는 급한 상황에 빠졌다. 21세기 들어 호황기에 급증하던 국내외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 한풀 꺾일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번 위기가 오히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

우선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기업들의 분별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이 높아졌다. 위기의 진원지인 금융 산업이 좋은 예다. 과거에는 금융기관들의 단기 이익 추구가 용인됐지만 이제 ‘지나친 탐욕의 결과’라는 비판과 함께 돈 버는 방식도 정당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런 압력은 규제 형태로 가시화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금융 소외자들이나 개도국 빈민에 대한 금융서비스, 신재생에너지 관련 파이낸싱 등 사회적 금융 서비스에 대한 금융기관들의 관심을 높이고 있다. 실추된 명성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파생금융상품과 무관해 부실 피해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꾸준한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작용하고 있다. 그동안 소형 금융기관 위주였던 마이크로파이낸스 분야에 씨티은행이나 HSBC 등 대형 금융기관들이 도매 형태로 진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로 금융위기 이후에도 다양한 사회 이슈에서 가치 창출 기회를 찾으려는 기업들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각국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부진한 민간 부문 수요를 공공 부문 지출로 보충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쓸 돈이라면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혜택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국가가 친환경 녹색성장에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구온난화, 물 부족, 자원 고갈과 같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이 분야 시장을 선점해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삼으려는 경주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경기부양책의 15%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데 사용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각국 정부의 부양책이 가져올 사업 기회에 기업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는 물론 LED 조명이나 전기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까지 녹색성장에서 사업 기회를 찾으려는 기업들은 과거보다 발걸음을 빨리 할 것이다. GE는 환경 분야에서 내년까지 250억 달러의 매출을 계획하고 있고 지멘스는 2011년에 250억 유로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노르웨이 해운사 ‘빌 빌헴슨’은 저탄소 사회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연료 소비와 이산화질소 등의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고자 노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암모니아로 이산화질소를 중화하는 기술이나 에어컨 시스템, 세척기술 등 다양한 혁신을 이루며 사업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녹색이 돈’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금융위기가 한창일 때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가 최고재무관리자(CFO)와 투자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절반 가까운 응답자가 환경과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게 주주가치 창출에 실질적으로 기여한다고 대답했다.

어쩌면 이번 경제위기는 기업들이 표방해 온 사회 공헌이나 사회적 책임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저 마케팅의 수단 중 하나쯤으로 생각했던 기업에는 사회적 책임이 겉치레를 위한 사치품이었던 것으로 판명날 것이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가치 창출 기회를 모색하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기로 작심한 기업에는 이번 위기가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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