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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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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89년 미국에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 란 책이 나왔다. 미국 경제의 장래를 위협하는 국제경쟁력 저하와 이의 회복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재정.무역부문에서 연간 1천억달러가 훨씬 넘는 방대한 쌍둥이 적자를 안고 있는 미국 경제의 위기를 분석한 보고서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MIT) 이 2년간에 걸친 상세한 사실관계 조사와 수백회의 인터뷰, 유럽.일본 등 3개 대륙의 기업을 방문해 경영자와 노조관계자의 증언을 들어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시대에 뒤진 경영전략, 경영자의 단기적이고도 좁은 시야, 개발과 생산에 있어서의 기술적 약점, 인적 자원의 경시, 정부와 산업체간의 협조부족 등을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로 지적했다.반면 일본의 강점은 기업간 협조, 정부와 산업계의 상호지원체제, 정부에 의한 조달관행, 메이커.공급업자.유통업자간의 긴밀한 네트워크 등으로 분석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그동안 계속되던 구조조정을 한층 가속화하는 한편 일본의 강점을 약화시키는 데 노력을 집중, 경제회복에 성공했다. 이 때 사용된 무기가 자율과 개방, 기업회계의 투명성,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 (국제기준)' 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원폭투하처럼 이 신무기는 지금 일본을 코너로 몰아넣고 있다. 사실 일본은 90년대초까지만 해도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과거 진주만 공습 때까지의 제국주의 일본처럼 - .일본은 85년 플라자 합의로 달러당 2백50엔대이던 엔화가 80엔대까지 하락했으나 첨단기술과 경영효율화로 이를 극복했다. 일본은 맹렬한 기세로 미국의 부동산.기업들을 사들이는 등 호황을 구가했다.

이같은 일본의 호황을 뒷받침한 것은 군국주의 일본시절에 생겨난 종신고용.행정지도.계열거래 등 과거 군국주의 시절에 생겨난 제도와 관행이었다.그러나 일본의 진격이 진주만에서 끝났듯 전후에 계속된 미.일 경제전쟁의 결말도 같은 꼴이 되고 있다.

제조업뿐만 아니라 금융.지적재산권 등 모든 분야에서 동일한 국제기준으로 경쟁을 강요하는 미국의 전략에 통제와 규제, 이를 통한 국가자원의 집중이라는 일본의 경제체제가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2차 대전후 맥아더 점령군 사령관의 일본개혁처럼 일본은 두손을 들고 미국이 강요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결과 일본은 싱가포르보다 낙후된 금융기관 등 정보통신 서비스 산업부문에서 연패, 경제가 뒤뚱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얘기는 간단하다.

체급 (體級) 도 고려하지 않고 강자만이 살 수 있는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미국의 룰에 따라 움직이는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다.

부실채권 처리를 미루다 건전한 제조업마저 소비위축 등으로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이 좋은 예다.

한국은 좋은 반면교사 (反面敎師) 를 옆에 두고도 개혁에 늑장을 부리고 있다. 한시가 시급한데도 6.4지방선거 등을 의식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캐내기 위해 '메이드 인 코리아' 를 만들기보다는 환란위기 책임논쟁이나 벌이고 희생양을 만들고 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외국의 투자자들은 한국의 개혁늑장에 실망, 관망 내지 발길을 돌리고 있다고 한다.

부실금융기관의 정리방법은 흡수합병.폐쇄 등 정리, 재정과 한국은행 특융 등의 극약처방으로 국가 전체가 부실을 떠맡는 세가지외에는 방법이 없다. 부실기업 처리도 유사하다.

최근 인도네시아사태로 위태위태하던 환율은 오르기 시작했다. 활기를 못찾고 있는 주식시장도 기진맥진,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도무지 경제난국 돌파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그런데도 말만 무성하다.

개혁이나 부실정리 원칙은 흔들리고 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 왜 6.4지방선거가 부실기업 정리에 고려사항이 되는가.

극단적으로 말해 누가 당선되면 어떤가.좌고우면하다가는 아무것도 안된다.

이석구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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