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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러바이트'로 출세 특급열차 오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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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11면

군사정권 시절, ‘찔러바이트’라는 말이 나돈 적이 있다. 당시 경찰과 정보부의 수사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활동하는 대학생 시위주동자들의 거처를 넌지시 ‘찔러’ 주고, 대가로 ‘현상금’을 챙기는 ‘아르바이트’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법정 현상금은 아니다. 또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찔러바이트를 했다는 학생을 보지는 못했으니, 정말로 학우를 돈 몇 푼에 팔아 넘긴 학생들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우정과 양심을 파는 값이 과연 얼마면 되었는지 알 길이 막연하다.

함규진의 조선 간신傳 <4> 충신 죽이기

그런데 조선의 간신들은 이 찔러바이트가 장기였다. 사극을 보면 곧잘 나온다. 쥐 같은 눈에 염소수염을 기른 늙은 대신들이 뭔가 속닥속닥하며 청렴결백한 충신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 장면이. 세월이 지나고 권력이 바뀌며 다소 과장이나 윤색된 점이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의 간신들은 실제로 누군가를 모해함으로써 라이벌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몸값을 높이는 일석이조의 술수를 곧잘 부렸다.

유명한 예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김질일 것이다. 명문의 후예이자 글 잘 하는 선비로 이름이 높았던 김질은 세조의 즉위 후, 친구였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변심하고 장인인 우찬성 정창손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정창손은 김질과 나란히 세조에게 ‘역모’를 고하였다.

이 일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비명에 갔으며 이후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하고 한명회·홍윤성 등 훈구공신들 위주의 정치를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친구이자 동지를 판 김질도 그 공신의 대열에 끼어, 23년간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며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고, 좌익공신과 좌리공신에 제수되었다.

김질은 한 차례 양심을 팔아서 출세한 경우지만, 이를 상습화해서 ‘밀고 전문가’가 된 사람으로 유자광이 있다. 그에게는 두 가지 불만이 있었다.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며, 내로라하는 주먹꾼이었음에도 계유정난의 주역들보다 조금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공신 대열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둘째였다. 다행히 그의 남다른 무재(武才)가 세조의 눈에 띄어 특별히 벼슬길에 올랐지만, 기본적으로 문을 무보다 앞세우고 출신 성분을 따지는 조선 사회에서 유자광은 늘 주변인이었다.

유자광은 예종 즉위년에 당시 ‘떠오르는 별’이던 남이를 역모로 엮음으로써 화려한 출세의 꿈을 되살렸다. 남이는 구성군 이준·강순 등과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삼십도 못 된 나이에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그러나 옛 공신세력인 한명회·신숙주 등의 견제를 받아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자 울적한 마음을 유자광과 술을 마시며 토로했는데, 이것을 기초로 남이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한 것이다. 천금 같은 기회를 잡은 한명회 등은 남이뿐 아니라 구성군과 강순 등까지 라이벌 세력을 일거에 쓸어버린다. 이 공로로 유자광도 익대공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2프로’ 부족했다. 공신의 명호와 봉록은 얻었지만 염원하던 고위 관직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유자광이 서자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으리라. 울분을 삼키던 그는 연산군대에 ‘무오사화’를 일으킴으로써 다시 한번 밀고의 힘으로 출세하려 한다. 세조실록을 쓰던 사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이 ‘조의제문’이라는 글로 세조를 에둘러 비난했음을 사초에 적자, 그냥 덮어두자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끝내 들춰내어 일대 피바람이 불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유자광은 연산군의 호감을 샀으며, 연산군 말기의 폭정 속에서도 유유히 지냈는데 마지막으로 연산군에서 중종으로 말을 갈아타려다 그를 혐오하고 있던 젊은 선비들의 집중 탄핵을 받고 야망과 배신으로 점철된 일생을 끝낸다. 유자광은 이 대표적인 밀고 외에도 항상 누군가를 비판하고 잘못을 들춰내는 상소로 조정을 시끄럽게 했다. 어쩌면 그의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살릴 기회를 주지 않고 출신만 보고 따돌렸던 당시의 사회도 잘못이었겠지만, 유자광의 처세술에 본받을 점은 찾기 힘들 것이다.

유자광이 밀고 전문가라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플레이’로 일관했다. 반면 하나의 조직, 또는 시스템을 정쟁과 누명 씌우기의 도구로 사용한 사람이 있었다. 광해군대의 이이첨이다. 그는 서자는 아니었어도 유자광만큼 출신이 보잘것없었는데, 세자 시절 친했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고개를 쳐들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동인, 서인의 붕당이 다시 북인, 남인으로 또 대북, 소북으로 연쇄 분열하면서 당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던 때였다. 이이첨의 진가는 여기서 발휘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사헌부와 왕에게 간쟁하는 사간원을 오가며 반대 당파 사람들에게 독화살 같은 비난을 쏘아댔다. 거지반 그의 힘으로 앞서 광해군의 세자 폐위를 거론했던 유영경이 쓰러지자, 이이첨은 정운공신이 되었다.

그 다음은 광해군의 친형이면서 정치적 경쟁자였던 임해군, 그를 역모로 몰아 귀양 보내고 결국 죽인 대가로 익사공신의 자리를 챙겼다. 그리고 4년 만에 또다시 김직재의 옥사. 사소한 공문 위조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뻥튀기해낸 이이첨의 천재적 재능이 한껏 발휘되고, 왕의 조카 진릉군의 목을 제물로 다시 형난공신으로! 다시 1년 뒤에는 ‘칠서의 옥’, 이것으로 왕의 장인인 김제남이 처형되고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의문사하며, 결국 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까지 유폐되고, 반대당의 영수인 이원익, 이항복 등도 제거됨으로써 이이첨은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다.

실로 ‘노리고’ ‘때리고’ ‘꾸미는’ 재주만으로 이룩한 ‘위업’이었으며, 또한 그 재주를 혼자 힘으로만이 아니라 조직 감찰 시스템을 최대한 사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달성한 목표였다. 이이첨이 이렇게 언론-감찰 기구의 명색을 버려 놨는지라 조선 후기의 뜻 있는 학자들은 언론기관 폐지 또는 축소론을 거듭 제기하고는 했다.

하지만 결국 ‘죄는 죄대로’ 가는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왕권을 노리는 불측한 무리들을 모조리 제거해 주었으니 고마워도 할 법하지만, 광해군은 허구한 날 남의 잘못만 캐고 음모만 꾸미는 이이첨에게 질려버렸다. 그래서 정작 진짜로 역모가, 즉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는 “이이첨이 또 뭔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군” 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무하게 왕위를 잃었고, 이이첨 역시 고생해서 얻은 지위와 영화를 하루아침에 잃고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적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전쟁이 아니다. 나와 경쟁하고 있는 상대도 적은 아니다. 남의 뒤통수를 쳐서 일시적으로 승리자의 기쁨을 만끽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희생자의, 주변 사람의, 그리고 나 자신의 양심의 비난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 비난은 불안을 빚고, 불안은 또 다른 음모를 부른다. 정도(正道)는 가장 느려 보여도, 결국 가장 빠른 길이 된다.


함규진은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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