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대량실업,구조적 대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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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안전망 (安全網) 은 추락하는 물체가 더 이상 떨어지지 못하도록 걸쳐 놓는 철망이다. 산간도로변 낙석지점에 둘러 쳐 놓은 철그물이 그 좋은 예다.

대량실업이 쏟아지면서 사회안전망 (social safety net) 의 필요성은 갈수록 절박하다. 속속 퉁겨 나오는 실직자들을 내버려 두면 그대로 사회의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직장에서,가정에서 떨어져 나온 거리의 노숙자들은 '도로 한복판에 나뒹구는 돌들' 에 비유될 수 있다.이들을 중간에서 받쳐 주는 사회적 장치가 곧 사회안전망이다.

사회안전망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보호장치다.안전망을 쳐 놓아도 굴러 내릴 돌들은 계속 굴러 내리고, 낙석이 심하면 안전망마저 함께 무너져 내린다.

실직자들이 다시 취업할 때까지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공공취로사업 등으로 한시적인 일거리를 제공하며, 재취업 알선과 재훈련.재교육을 해주는 일들을 말한다.

사회안전망이 어선의 저인망처럼 사회 저변에 제도적으로 잘 깔려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유럽의 복지국가들이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후한 실업급여 때문에 웬만한 일자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회 전체적으로 근로의욕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가운데 정부재정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사회안전망에 너무 안주한 나머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먹고 노는 실업자가 도리어 늘어난다. 고복지국가들의 고실업 딜레마다.

실업대란을 맞아 정부는 추가 재정적자를 무릅쓰면서까지 고용유지.생계지원.실업급여.재훈련 등 4개 분야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독일은 지난 68년부터 73년까지 우리 식의 노사정위 (Konzentriete Aktion) 를 운영하면서 국내총생산 (GDP) 의 18%까지를 실직자 보장에 쏟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업률을 낮추지는 못했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글로벌경쟁.노동절약적 기술발전.다품종소량생산이 체질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도적 안전망이 갈수록 경직적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업대책은 최소한의 안전망을 확보하면서 대량실업에 구조적.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의 실업률은 사실상 공식통계의 4~5배로 봐야 한다. 미국의 컨설팅회사 부즈&앨런은 이를 '유보적 실업' 으로 표현했다.

경쟁력을 상실했거나 국내시장 보호막 뒤에 엎드려 있는 산업과 기업들이 억지로 떠안고 있는 종업원들이다. 사실상 없어도 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안고 있는 비효율적 인력들이다.

중복.과투자 부문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들을 떨궈 내면 실업률은 제조업에서 7%, 서비스산업에서 2.3% 등 무려 9%포인트 이상 높아진다는 분석이다.기업들에 해고를 못하게 자금지원을 하고 이를 통해 고용을 유지하려 든다면 경쟁력은 물건너간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하면 해고를 못하고 임금을 맘대로 못 깎는 것만 연상한다. 경쟁력 확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노동기능의 경직성이다.

노동력을 핵심노동력과 주변노동력으로 구분하고 주변인력은 산업과 기술의 변화에 맞춰 재교육과 재훈련으로 발빠르게 전환시켜야 한다. 80년대 미국의 구조조정때 대기업에서 잘려 나온 수십만명이 재훈련과정을 통해 컴퓨터 및 벤처소기업들로 흡수됐다.

우리의 수출주도 성장은 서비스부문의 희생 아래 제조업부문의 집중투자로 이뤄져 왔다. 수출에는 기여를 못해도 고용창출과 외국인 직접투자를 늘릴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서비스산업이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새 일자리 창출이고, 이를 위한 구조적인 밑그림을 서둘러야 한다. 구조조정과정에서 대량실업은 어차피 불가피하다.

이를 슬기롭게 참고 견디는 사회적 인내말고는 묘책이 있을 리 없다. 실직자들의 절규는 이를 데 없이 딱하다. 그러나 집단시위나 물리력으로 나선다면 한국경제는 파국이다.

우리는 지금 터널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다. 터널 끝쪽의 밝은 빛은 요원하다.

혹 충돌을 향해 마주달려오는 섬뜩한 불빛을경계해야 할 때다.

변상근<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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