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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누가 광장을 두려워하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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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광장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그리스 시대에는 폴리스마다 중심에 아고라라는 광장이 있었고 그 옆에는 대개 시장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사람들은 광장과 시장에 모여 일상생활에서 정치·철학까지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가 곧 그리스의 철학과 민주주의를 낳았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같은 시대와 같은 공간에 살았던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페리클레스였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자연발생적으로 광장이 생겨났지만 그리스 문명을 추종하고 계승한 로마 시대에는 아예 도시를 계획할 때부터 광장을 염두에 두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는 TV나 신문에서 여론 형성의 계기로 자주 언급되는 포룸(영어의 포럼)이다. 로마 도시의 포룸 옆에는 바실리카가 있었는데, 원래 시장 용도의 건물이었다가 나중에 중세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는 유서 깊은 교회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도 르네상스기에 개축되기 전까지 1000여 년 동안 고대의 바실리카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나의 지배적인 이념이 자리 잡으면 광장은 쇠퇴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강력한 권위가 사회를 질식시키듯 옥죄고 있는 시대에는 토론의 자유가 용납되지도 않고 토론할 주제도 없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 사회에서 광장 문화가 거의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권위가 힘을 잃게 되면 광장이 되살아날 것은 정한 이치다. 과연 교회가 몰락하고 중세가 해체되자 즉각 광장이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다. 광장은 낡은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1649년 영국의 찰스 1세는 웨스트민스터의 화이트홀 광장에서 처형되었고, 150년 뒤 프랑스 혁명을 맞아 루이 16세는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이 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국왕이 공개 처형된 사건을 반드시 진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적 모멘트를 맞아 광장이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무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 공교롭게도 영국과 프랑스의 두 국왕은 광장이 상징하는 민주주의의 물결을 거부한 대가를 바로 그 광장에서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반면 동양의 역사에서는 광장 문화를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자생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서양의 도시는 국가와 별도로 발생하고 발달했으므로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한가운데 광장이 조성되고 광장 문화가 싹텄다. 광장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조성되고, 도시의 규모가 커지면 이웃에 또 다른 광장과 시가지가 조성되어 다른 광장과 이어지는 방식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탓에 프랑스의 파리 같은 도시에는 지금도 수십 개의 광장이 있고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도로들이 뻗어 나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자치도시의 역사가 오랜 서양의 도시와 달리 동양의 도시는 예부터 국가에 종속된 행정도시(변방의 경우에는 국경 수비용 도시)로 발달했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지배와 관할을 받았으므로 도시는 자체의 여론을 조성할 힘도, 이유도 없었다. 더욱이 중앙정부의 견해와 다른 여론이 발생하는 것은 큰 국가적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양의 도시에 광장이 생겨나는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광장과 광장 문화가 민주주의 초석이 된 이유는 여론 수렴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광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광장을 매개로 발생하고 숙성한 여론은 정책 입안의 좋은 기회가 된다. 물론 광장 문화가 순전히 광장에 모인 군중의 고양된 감정과 물리적인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 광장의 무의식적 힘을 의식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늘 실패했다. 그렇게 보면 광장에서 표출되는 ‘원초적’ 여론을 적절히 수용하는 능력은 현명한 정부의 초석이라고 할 것이다.

남경태 역사 및 철학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