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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피로 물든 신미양요 집권층 오만·무지가 부른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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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871년 6월 10일 토요일. 쾌청하고 더운 날씨였다.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미 아시아함대가 나타났다. 9인치 포를 뽐내며 모노카시호가 선두에 섰고 곡사포를 실은 4척의 군함이 뒤따랐다. 그 뒤에는 팔로스호가 상륙용 보트 22척을 끌며 모습을 나타냈다. 포함의 포신이 불을 뿜었고 초지진은 초토화됐다. 다음날 미군은 진무(鎭撫)장군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 공략에 나섰다. 함포와 상륙부대의 곡사포 포격에 맞서던 143문의 조선 대포는 곧 숨을 죽였다. 한 시간 동안 휘몰아친 집중포화가 잦아들자 광성보 정상에서 나부끼던 장군의 군기는 퍼비스와 브라운 두 병사의 손에 끌어내려졌다. 가로 세로 4.5m의 대형 수자기(帥字旗) 앞에 총을 잡은 채 서있는 사진 속 두 사람이 그들이다. 한 미군 병사는 그날의 처절한 전투를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군은 반격하기 위해 탄약을 갈아 넣을 시간이 없자 담장 위로 기어올라 돌을 던져 우리의 진격을 막아보려 했다. 창검으로 맞서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맨주먹으로 싸우며 침략군의 눈을 멀게 하려고 모래를 뿌려댔다. 어떤 이는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날 폐허가 된 광성보에는 총탄을 막는다는 아홉 겹으로 솜을 둔 두터운 무명 전투복을 입은 채 숨진 전사자가 243명이나 됐고 옷에 불이 붙은 채 뛰어내려 바닷물을 붉게 물들인 병사도 100여 명을 헤아렸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슐레이 소령은 적이지만 조선군이 보인 감투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한 미군의 피해 상황에 비춰 그때 전투는 명백한 패전이었다. “서양인의 배가 내뿜는 포연이 천하를 뒤덮어도 동방의 해와 달은 영원히 빛나리라”며 ‘승리’를 자축한 흥선 대원군의 호언장담은 빛을 잃는다. 1854년 미국의 포함외교에 굴복했던 일본은 20여 년 만에 미국을 흉내 낸 포함을 동원한 무력시위로 조선을 개항시켰다. 그때 우리의 역사시계는 거꾸로 갔다. 대원군의 쇄국 양이정책은 명백한 시대착오다. 그의 오판은 우리를 망국이라는 늪에 빠뜨리고 말았다.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다시 작동하는 오늘. 제국 미국에 핵을 무기로 맞서려는 북한만이 아니라 우리의 위정자들에게도 수자기는 치욕의 과거사를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다가선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