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국민훈장 박차증씨, 홀로 5남매 훌륭히 키워

8일은 어버이날. 삶이 고달퍼 낳은 정, 기른 정마저 포기해 경제파탄이 가정파탄으로 이어지는 요즘 갖은 고난속에서도 묵묵히 사랑하는 가족들을 이끌어가는 모정이 더욱 소중하기만 하다. IMF시대에 맞은 어버이날,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괴롭고 슬프고 아플 여유도 시간도 없었어요. 웃으며 스스로 힘을 내지 않고는 다섯아이와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요" 그 때문일까. 찌든 가난속에서도 남편없이 5남매를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키워낸 박차증 (朴且憎.60.대전시중구용두2동) 씨와 만났을 때 그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한 선입관은 한순간에 부서졌다.

나이를 잊은 듯 허공을 쨍하게 울리는 밝은 소프라노의 목소리, 붉은 혈색이 건강해보이는 그의 모습 어디에도 아프고 힘든 과거의 그림자는 없다.

"사랑했던 남편이 아직 내가슴에 살아있는데 내가 어찌 그사람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지난 81년 신장염.고혈압으로 투병하면서 퇴직금마저 날려버린 남편이 세상을 떠날때 43세의 그에게 주고 간 것은 초등학교 코흘리개에서 대학생까지 모두 학교에 다니는 다섯아이. 그리고 겨우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8평짜리 흙벽집과 앓던 이부자리밑에 놓여있던 단돈 1천5백원이었다.

'굶을 일' 외에는 달리 대책이 없는 듯 했다. 남편과 사별한지 17년. 그러나 그는 이제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불현듯 느낄 정도로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됐다.

재산세를 낼 필요도 없는 흙벽집 둥지는 여전하지만 모두 한방에 누워잤던 그의 아이들은 이제 모두 제 갈길로 떠났다. 당시 대입을 준비중이었던 큰 딸 (39) 은 대전시 보건환경연구원으로, 서울 공대 1년생이었던 둘째 (아들.37) 는 공주대 전자공학과 교수, 세째 (딸.34) 는 충남대 원자력 연구소 선임연구원, 네째 (딸.31) 는 대구중학교교사로, 다섯째 (아들.29) 는 의사수련생으로 각자 새로운 둥지를 만들어 나간 것.

그러나 어찌 지나온 세월이 가벼웠으랴. "남편이 업고 다니지 않아도 될 나이의 아이들만 남겨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지요. " 남편을 원망하기에는 너무 절박했던 그는 이렇게 생각하자 힘이 불끈 솟더라고 했다. "우리가족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생각했어요. 등록금.차비.연탄.쌀.소금 이 다섯가지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더니 의외로 쉬워보이더군요. " 한번도 집밖의 일을 해보지 않았던 그가 힘들게 얻은 직업은 화장품 외판원.

'먹고 살기위해 서방질과 도둑질 빼고는 다했다" 는 말을 평소 싫어했던 그인지라 '한우물을 파자' 고 결심했다. 다섯아이의 학비를 벌기 위해 그는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남의 가정사 어려운 일들을 내일처럼 돌봐주면서 단골을 늘려나갔다.

디프테리아 등의 병으로 아이가 사경을 헤맬 때도 외판을 계속했다. '넷을 살리기위해 하나를 포기해도 할 수 없다' 는 모진 절규를 가슴에 안고.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은 학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을 타내는가 하면 아르바이트를 해 제동생들의 학비를 보탰다.

아이의 학비가 모자라 동사무소에 구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는 밤거리를 미친듯이 헤매며 울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4대를 잇는 튼튼한 징검다리다.

딸의 험난한 인생을 한방에서 자며 수십년간 지켜봐온 올해 90의 꼬부랑 친정어머니와 맞벌이 첫째며느리가 돌봐주길 요청한 갓난 손녀가 하늘처럼 그를 의지하고 있다.

마흔을 앞두고도 짝을 구하지 못한 소아마비 장애의 큰딸, 그리고 6년전 자신이 당한 대형 교통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외판원을 그만뒀다) 이 그를 아직 어둡게 하지만 남 앞에서는 생전 고통이 없었던 사람인양 밝은 웃음을 쏟아내 옆사람도 들뜨게 한다.

"울 바에는 웃으세요. 괜히라도 웃다보면 기분이 밝아져 힘이 생겨요. " IMF시대, 남편의 실직.부도 등으로 한숨이 그칠 날 없는 아내들에게 들려주는 박씨의 한마디. '웃음전도사' 인 그에게 정부는 어버이 날을 기려 국민훈장을 수여한다.

대전 = 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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