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장악력 떨어지고 군소업체 군웅할거 시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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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22면

유동성 거품 시절 중국 마카오에 새로 건설되기 시작한 카지노들. 카지노 업체들이 글로벌 신용경색 여파로 자금난에 빠지자 일시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1000억 달러(130조원)가 110억 달러(14조원)로’.
2007년 9월과 올 4월 말 현재 미국 카지노 업체들의 시가총액이다. 1년 반 만에 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자산 거품이 터지면서 그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았기 때문이다. 메이저 카지노 업체들은 줄줄이 위기에 빠졌다. 미국 트럼프엔터테인먼트와 트로피카나엔터테인먼트는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MGM미라지·라스베이거스샌즈·윈리조츠 등도 파산보호 신청을 준비하거나 워크아웃을 추진하고 있다.

카지노 자본 판 바뀌는 시장

이들 업체의 위기는 ‘카지노 영웅들’의 추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라스베이거스샌즈 회장인 셸든 아델슨과 MGM미라지의 주인인 커크 커코리언, 트럼프엔터테인먼트 대주주인 도널드 트럼프(부동산 왕)는 재산이 크게 줄어들거나 명성에 금이 가는 수모를 당했다.방심과 욕심이 화를 불렀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업체인 해러스엔터테인먼트의 최고경영자(CEO) 존 페인은 최근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저금리 시대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봤기 때문에 빌딩을 추가로 짓고 직원을 더 많이 채용해 규모를 키우는 전략에 치중했다”고 말했다.

마침 이머징마켓 국가들이 관광 수입을 늘리기 위해 카지노를 양성화했다. 이른바 ‘카지노 해금’이었다. 내전으로 찌든 라오스 등 동남아 지역에 우후죽순처럼 카지노 리조트가 들어섰다. 업계는 카지노만 지어 놓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봤다. 유달리 도박을 좋아하는 중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지노 증설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었다. 카지노 업체들은 돈값(금리)이 낮은 점을 이용해 금융회사들에서 뭉칫돈을 끌어다 카지노를 지었다. 돈의 흐름이 역회전하는 순간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금난·파산 등 거품 시대의 후유증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미 집값이 붕괴하면서 불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가 부실화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졌다. 흘러넘치던 자금은 한순간에 말라 버렸다. 뒤이어 경기침체가 엄습했다. 집값이 급등하던 시기에 여행 경비를 늘렸던 중산층은 지갑을 닫았다. 카지노 업체들엔 이중 타격이었다. 돈 가뭄은 업체들에 새로 짓고 있는 카지노 공사 대금을 감당하지 못하게 했다. 내장객이 적어지면서 수입도 줄어 실적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이는 고스란히 카지노 메이저 업체들의 주가에 반영됐다. MGM미라지와 라스베이거스샌즈·윈리조츠 등의 주가는 지난 한 해 동안 각각 83%, 94%, 61% 폭락했다. 같은 기간 뉴욕 증시의 S&P500지수는 38% 주저앉았다.

카지노의 위기는 지역 경제를 극도의 침체로 몰아넣고 있다. 카지노 업체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몸집을 줄이는 과정에서 직원을 대거 내보내고 있다. 최근 라스베이거스샌즈는 마카오에서 직원 4500명을 잘랐다. 파산보호를 신청한 트로피카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직원 7000명을 내보냈다. 그 결과 한때 라스베이거스와 마카오 경제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었다. 특히 해고된 직원이 집을 서둘러 팔아 치우는 바람에 라스베이거스 집값은 미국 20대 도시 가운데 가장 많이 추락한 곳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카지노가 불황에 강하다’는 통념이 여지없이 무너진 셈이다.

카지노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서 합법화되면서 산업으로 떠올랐다. 1931년 3월 19일 미국 네바다 주지사 프레디 B 발저는 도박 합법화 법안에 서명했다. 주의회가 격론 끝에 통과시킨 것이었다. 대공황 극복과 세수 확대가 명분이었다. 이후 네바다주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풀밭이었던 라스베이거스는 세계 카지노의 메카로 떠올랐다. 돈·섹스·도박…. 라스베이거스는 영원히 불황을 모르는 도시가 될 것 같았다. 대공황이 끝난 직후 발생한 37년 침체를 비롯해 50년과 73년, 80년, 91년, 2001년 등 역대 불황기에 라스베이거스의 네온사인은 꺼지지 않았다.

사실상 첫 위기를 맞은 카지노 업계는 요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월가의 카지노 애널리스트들은 “글로벌 카지노 지형이 변하고 있다”며 “31년 이후 78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 카지노 산업이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메이저 업체들의 장악력이 줄어들고 군소 업체들이 군웅할거하는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시작은 메이저 회사들의 자산 매각이다.

최근 MGM미라지와 라스베이거스샌즈 등은 빚으로 얼룩진 회계장부를 깨끗이 하기 위해 자산을 서둘러 팔고 있다. 그동안 메이저 업체들의 위세에 눌려 카지노 산업에 진출하지 못했던 도전적인 사업가들이 그 자산들을 속속 사들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필 루핀이다. 미국의 억만장자인 그는 최근 MGM미라지의 커코리언에게서 라스베이거스 트레이저 아일랜드 카지노를 7억7500만 달러에 사들였다.

루핀 등 신예 플레이어들은 기존 카지노 영웅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유동성 거품 시절 기존 플레이어들이 양적 팽창을 추구할 때 몸을 사리며 재산을 지켰다. 호황의 순간에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렇게 힘을 비축한 신예 플레이어들은 위기가 닥치자 힘을 내고 있다. 카지노를 싼값에 사들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들은 양적 팽창보다 효율성을 중시한다. 카지노 숫자를 늘리기보다 다양한 마케팅 기법으로 고객을 더 많이 유치해 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이런 신예 플레이어들의 등장과 함께 카지노의 세금을 인상하려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경기부양 차원에서 재정지출을 늘린 미 주정부들이 카지노 세율을 높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카지노 업체들이 반발하고 있지만 이미 네바다 주의회 등에는 세율 인상 법안이 제출됐다.

잿더미 속에서 움트는 희망
워크아웃을 추진 중인 MGM미라지는 최근 25억 달러를 조달했다. 주식을 공모해 10억 달러를 유치했고 사모 방식으로 15억 달러를 끌어들였다. 극심한 돈 가뭄에 시달려 온 업계로선 가뭄 속 단비가 따로 없다. 신용평가회사인 피치는 MGM미라지 신용등급을 높였다. C에서 CCC로 상향 조정한 것이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도 이 회사 신용등급을 높일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카지노 위기 와중에 날아든 희소식인 셈이다. 피치는 “MGM미라지가 공모와 사모 방식으로 25억 달러를 조달해 빚 140억 달러 가운데 일부라도 갚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해 미 투자은행 JP모건은 MGM미라지와 윈리조츠에 대한 투자 의견을 ‘중립’에서 ‘매수’로 높였다.

메이저 카지노 업체의 파산도 더 이상 발생하지 않고 있다. 호황기에 카지노업체에 신디케이트 방식으로 뭉칫돈을 빌려줬던 금융회사들이 만기를 연장하고 금리를 깎아 주는 등 채무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S&P의 신용분석가인 벤 부베크는 “채권 금융회사들이 신용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 서서히 수익을 얻을 곳을 물색하고 있다”며 “그들은 카지노 업체들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해 워크아웃에 동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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