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금융개혁 큰 그림 그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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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한국의 체면은 말이 아니다. 외국인이 장부가 투명하지 않다고 흠을 잡아도 할 말이 없고 국내은행의 잘못된 대출 관행을 지적하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외국인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 들을 판이다.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등급을 조정하면 영락없이 일간지 1면감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은행부실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국제결제은행 (BIS) 이 최소자기자본비율을 설정했을까. 따지고 보면 요즘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구조조정기금이니 가교은행이니 하는 아이디어도 미국에서 빌려온 것이다.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가 미국에도 있었다는 말이다.

80년대말 미국의 저축대부조합 (S&L) 들이 잇따라 쓰러지자 저축대부조합보험공사 (FSLIC) 는 기금이 고갈, 도산했다. 금융산업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84년에서 94년까지 10년동안 은행은 1만1천개중 3천5백개, 저축대부조합은 3천4백개중 1천4백개가 망했고 직장신협은 1만5천개중 3천개가 문을 닫았다.

규모가 컸던 10개 은행의 도산으로 발생한 손실만 합해도 1백29억달러 (약 18조원)에 달했다.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실정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미국엔 애초 은행 숫자가 많다보니 부실한 은행에 영업정지 명령을 내리거나 건전한 은행으로 하여금 합병토록 해도 충격이 상대적으로 덜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시기 은행에 대한 수술은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부실은행을 정리하기 위해 새로운 법규 (예를 들면 89년의 금융기관조정집행법) 와 조직 (파산한 저축대부조합보험공사를 대체할 새로운 보험기금을 만들고 부실채권정리 전담기관인 정리신탁공사를 설립) 을 만들었다.

은행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는 물론 주주.의회 및 감독당국의 감시소홀도 지적됐다. 비록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을 고쳐 호황의 밑거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29~33년의 대공황때도 은행법.증권거래법 등을 만들고 뉴딜정책을 채택,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 처지를 창피하게 여길 것도 허겁지겁할 것도 없다. 당면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린 후 착실하게 해결해나가면 된다.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다. 각종 이해집단의 눈치나 보는 얄팍한 정치적 감각이 아니라 비전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리더십이 아쉽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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