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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면 털리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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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말 당선자 시절 민주당 당직자들 앞에서 했던 말이다. 청탁 근절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무심코’ 한 말이겠지만, 비판을 받았다. 다른 어떤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서든, 세무조사를 수단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임 기간 동안 비교적 권력기관을 사사로이 동원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그도 이랬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세무조사는 손오공의 여의봉 같다. 재정·금융정책과 함께 당당하게 거시정책의 하나로 꼽힌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자제나 유예 조치를 발표한다. 지난해 말 국세청은 경제 살리기 차원에서 올해 세무조사를 최소화한다고 밝혔다. 과거 정부 때도 그랬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엔 국세청뿐만 아니라 공정거래위원회까지 나서서 비슷한 ‘배려’를 해줬다.

세무조사는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미시 대책의 일환으로도 쓰인다. 지난 2월 국세청은 신규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을 세무조사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정책수단으로서 세무조사의 오지랖은 이렇게나 넓다. 맘먹고 털면 털리기 쉽기에 세무조사 안 하는 것 자체가 ‘당근’이 되는 것이다. 세무조사는 국세청이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인데….

언뜻 보면 힘겹게 생존터널을 지나고 있는 기업에 대한 정책 당국자의 사려 깊은 배려 같지만 곱씹어볼 문제가 많다. 기업이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감시하는 잣대를 경제상황에 따라 고무줄처럼 줄였다 늘였다 해도 되는 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회사 일을 걱정하는 노 전 대통령에게 “괜찮다”고 했다. “한번 구속된 후 모든 것을 ‘법대로’ 하라고 직원들에게 수시로 지시하고 있으며, 모든 일을 변호사·회계사의 조언을 받아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 회장도 결국 구속됐다. 노 전 대통령은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며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게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라고 토로했다. 노무현 수사의 실마리가 된 것도 지난해 7월 시작된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 세무조사였다. 지방 신발공장 하나를 ‘털기’ 위해 국세청 최정예 부서가 나섰다는 점에서 뒷말이 나왔다.

‘털면 털린다’는 인식이 어디 세무조사뿐인가. 털면 털리는 나라에서 검찰이 한번 눈 부라리고 달려들면 맘 편할 사람은 없을 게다. 권력의 사용(私用)을 막기 위해 대통령의 선의(善意)에만 의존할 수도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건강한 시민사회의 감시 아닐까. 정권이나 조사대상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을 떠나 세무조사·검찰권 발동에 치우침이 없는지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 아쉽다. 이번 검찰 수사에 대한 입장이 과거 김대중 정부 말기의 언론사 세무조사나 검찰 수사 때의 입장과 정반대라면 그것도 문제 아닌가.

서경호 중앙SUNDAY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