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국내외 연구 어디까지 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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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국내에 한 점도 없던 고조선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했던 지난 열흘 남짓. 고조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학계에서도 미송리형 토기의 출현을 계기로 고조선 연구가 전기를 맞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묻혀있다.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의 견해들도 갈리고 남.북한의 주장도 많이 다르다.지금 우리에게 떠오르는 궁금증은 '과연 고조선은 어디쯤 있는 것일까. ' 최근까지 진행된 고조선 연구의 성과와 학설의 갈래 등을 통틀어 '고조선 찾아가기' 마당을 마련했다.

고조선은 민족사의 원류 (源流) 로서 인식되었던 까닭에 역사학자나 일반인 모두의 높은 관심 속에 지속적으로 조명되어 왔다.고조선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얼마나 큰 나라였는가?

그러나 학자들마다 백가쟁명 (百家爭鳴) 하여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에 관한 사료가 많지 않다는 학문적 이유 이외에도 민족의 영광이라는 학문 외적인 문제가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삼국유사 (三國遺事)' 에서 단군의 개국은 중국의 요 (堯) 임금시대와 같다고 한 이래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민족의 자존심과 관련되는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오늘의 학계에서도 기원전 4~5세기경에 건국되었으리라는 신중론으로부터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건국되었다고 보는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단군왕검이 다스리던 아사달 (阿斯達) 사회는 신석기 문화 전통을 강하게 지닌 초기 청동기사회이며, 부족연맹 형태를 띤 일종의 신정국가 (神政國家) 로 이해된다과거에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을 대동강유역에 둔 결과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상한선이 기원전 10세기를 넘지 못했던 까닭에 단군신화에 반영된 고조선의 건국기년 (建國紀年) 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하 (遼河) 유역으로 보면서부터 어느 정도 성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북한학계의 경우 요동반도의 유적들을 통하여 고조선 건국시기를 기원전 1000년전반으로 보아왔으며, 우리 학계도 요령지역의 비파형 (琵琶型) 동검문화에 주목하여 은주 (殷周) 유민이 동으로 이주하던 시기인 기원전 1100년경이나 요동지역에서 청동기문화가 개화한 기원전 1500년경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 됐다.

한편 최근 북한학계는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고조선 개국시기를 기원전 3000년경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지질시대를 측정하는 '전자상자성공명법' 을 이용한 측정방법의 문제 등 의문점이 허다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조선의 중심과 강역에 대한 문제도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때로는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유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요동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학문적 차원을 떠나서 애국심 논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했지만 크게 대동강중심설, 요동중심설, 이동설로 견해들이 나뉜다.

대동강중심설은 종래 학계의 통설이지만 마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유역으로 고정함으로써 한국사의 무대가 한반도로 축소.왜곡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그러나 이 견해는 일본의 독창적 연구는 아니고 고려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보다 체계화되어 오늘날의 학계에 계승된 것이다.

최근 북한학계도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그간의 요동중심설을 포기하고 대동강 중심설로 급선회하고 있다.요동중심설의 경우에도 1920년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어 마치 이를 계승한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미 조선시대부터 논의되어 오던 것이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를 계승하고 6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북한학계의 주류를 이루던 학설이다.요동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와 북한학계의 요동중심설에 자극을 받아 우리 학계도 비파형 동검.미송리형 토기등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와 문헌사료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통하여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동에 있었으나 기원전 4~3세기경에 대동강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이른바 이동설도 제시됐다.

고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였을까하는 점도 관심거리다.아테네와 같은 도시국가였는가, 아니면 로마와 같은 대제국이었는가? 일부에서는 고조선은 출발부터 대제국이었다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전제되어야 한다.영역의 크기는 그 사회가 가지는 문화수준에 따른 사회구성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환상의 국가' 가 아니라 우리가 세운 '최초의 국가' 라고 한다면, 고조선은 형성부터 멸망시까지 동일한 성격을 지니지는 않았을 것이다.고조선은 세계의 유수한 고대 문명국가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아사달' 로 불리어진 '성읍국가 (城邑國家)' 로부터 출발하여 중국의 통일제국과 맞섰던 대고조선 (大古朝鮮) 시대로 발전한 생동하는 구체적 실체이다.

다만 현재 고조선의 표지 (標識) 문화로 거론되는 비파형동검이나 미송리형토기의 경우 그 분포 범위가 넓고 지역적 성격이 달라 그것이 문화권인지 정치적 세력권인지의 문제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서영수<단국대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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