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과 와인, 궁합 잘 맞는 짝이에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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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빌딩 숲인 서울 시청 근처에서 출발해 버스로 40분 정도 지났을까. 새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개천이 눈에 들어왔다. 경기도 양주·고양·파주를 지나는 공릉천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공릉천 인근에는 ‘마지막 개성상인’이라 불렸던 고 한창수(1919-2000) 선생이 조금이라도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려고 마련한 ‘개성농장’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딸인 한상인(59·사진)박사가 살면서 문화 공간으로 가꾸고 있다.


이곳은 지휘자 정명훈씨와 김화영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등 문화인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다. 김 교수는 이곳이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지역처럼 아름답다며 이곳을 ‘한국의 작은 프로방스’로 부른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종종 찾아온다.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이던 시절 선친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게 인연이 됐다.

한 박사의 선친은 6·25전쟁 중에 고향인 개성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뒤 ‘개성상회’를 꾸리며 인삼으로 번 돈으로 문화인·정치인들을 후원했다. 이렇듯 음식과 술, 그리고 사람을 좋아했던 집안의 내력으로 인해 한 박사도 와인과 음식에 관심이 많다. 유학을 간 프랑스에서 정치어휘통계학으로 박사를 받은 그는 92년부터 97년까지 파리4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시기까지 합쳐 20년 넘게 현지에 살았다. 그동안 와인에 푹 빠졌다. 2002년 영구 귀국한 뒤 서울 프랑스문화원 등에서 와인 강좌를 열고 있다. 약초와 돼지를 키우던 농장을 와인과 문화의 공간으로 바꿨다. 서늘한 와인 저장고 한쪽엔 그의 선친이 직접 담근 인삼주 독도 있었다.

그런 그가 지난달 30일 프랑스문화원과 함께 ‘와인과 함께하는 한식세계화’ 행사를 이 농장에서 열었다. 120여 명이 참석했다. 예산은 한 박사가 이끌고 있는 와인 모임의 회원들이 갹출했다. 일찌감치 해외에 진출한 벽제갈비에서 음식을 후원했다.

이날 식사는 길쭉한 접시에 단호박 샐러드와 갈비가 함께 나왔으며, 작은 접시에 담긴 백김치를 곁들였다. 방짜 유기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비빔밥이 담겨 나왔다. 이날 한복 패션쇼와 판소리 공연도 열렸다. 한 박사는 “프랑스에서 오래 살면서 한식의 중요성을 많이 느꼈다”며 “평소 손님 접대를 할 때도 스테이크에 직접 기르고 담근 열무김치를 곁들여 내놓는다”라고 소개했다. 이날 행사에 대해 프랑스문화원장인 로르쿠드레 로는 한 박사에게 “다음에는 프랑스에서 이 행사를 열자”라고 제안했다. 프랑수와즈 티에보 주한 프랑스 대사 부인은 “외국대사의 부인으로서 많은 행사에 참여했지만 오늘의 행사는 너무도 아름답고 특별하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한 박사는 와인과 한식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식과 와인은 궁합이 잘 맞는 짝이에요. 둘 다 발효·숙성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지요. 김치 독과 와인 오크통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와인을 수입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음식을 수출하기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한식은 물론 한국 문화 전반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한식세계화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넓고도 깊은데, 잘 활용해야지요. 그냥 쇼를 하는 걸로 그치면 안 돼요. 그들의 문화에 파고들어가야 합니다.”

그는 한식과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원”이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에게 무작정 한식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한식과 와인을 엮어서 내놓는 게 효과적이에요.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 맛있는 것을 원하지요. 제가 볼 때 유럽인들은 한식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내놓는가가 문제입니다.”

30일에 개최한 행사도 일회성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매년 프랑스의 유명 와인 산지를 방문하면서 와인제조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를 한식세계화에 활용하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의 유명 샤토(포도원)에서 한복 패션쇼를 열고 한식과 함께 어울리는 와인을 내놓는 행사를 여는 것이 꿈입니다. 문화의 힘을 십분 활용해야 해요. 프랑스에 오래 살면서 한국 영화가 주목을 얻으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도가 확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어요. 이젠 한국음식의 차례입니다.”

글=전수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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