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이 유일하게 관을 멘 동지, 장하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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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33면

마오쩌둥이 직접 장하오의 주검이 들어있는 관을 메고 있다. 가운데 맨 앞이 마오. 넷째가 양상쿤 전 국가주석, 왼쪽 안경 쓴 사람이 주더. 마오의 바로 뒤는 쉬터리. 오른쪽은 장하오의 부인과 아들. 김명호 제공

1942년은 중일전쟁이 가장 치열할 때였다. 같은 해 3월 9일 중국공산당이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정한 이래 가장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 주인공은 장하오(張浩)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15>

장하오와 마오쩌둥은 1921년 후난성 창사(長沙)의 방직공장 노동자 숙소에서 인연을 맺었다. 2년 후 다시 만났지만 인력거꾼 총파업을 함께 지휘하고 또 헤어졌다. 12년 후 장은 코민테른의 대표 신분으로 장정(長征) 도중이던 마오의 앞에 나타났다. 가장 강력한 병력을 소유하고 있던 장궈다오(張國燾)가 새로운 당 중앙을 선포하는 바람에 공산당이 분열 위기에 빠져 있던 때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휘하에 있었지만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장하오는 코민테른이 파견한 대표 자격으로 장궈다오를 설득해 당의 분열을 막고 마오쩌둥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장하오는 중일전쟁 초기 129사단의 정치위원이었다. 자주 실신을 하는 등 건강에 문제가 많았다. 사단장은 당 중앙에 장하오의 치료를 건의하며 새로운 정치위원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장을 옌안으로 강제소환하고 덩샤오핑을 후임으로 내보냈다.

장하오는 지하 공작자답게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중앙위원 선출 당시 모습.

장하오는 뭐든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간호하는 사람이 잠깐 한눈을 팔면 밖으로 뛰쳐나가 일거리를 만들곤 했다. 노동자학교를 만들고 그곳에서 강의했다. 1938년 가을 중국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장은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마오쩌둥의 추천이었다. 회의 직후 기념촬영을 했다. 장이 맨 뒷줄 오른쪽 끝에 서있는 것을 발견한 마오는 그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하오·린뱌오(林彪)와 함께 끝줄 맨 구석에 서 있는 모습을 후세에 남겼다.

1940년 4월 30일 장하오는 국제 노동절 경축식에 참석해 연설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생명은 건졌지만 반신불수가 됐다.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는 동안 마오는 틈만 나면 장의 옆을 지켰다. 이듬해 8월 일본군 폭격기가 옌안을 공습했다. 폭탄 하나가 장의 동굴 위에 떨어졌다. 진동과 폭음이 그치지 않았다. 심장이 타격을 받아 세 배로 부어 올랐고 폐에도 물집이 생겼다. 마오는 명의들을 총동원해 장을 치료하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병실을 찾았다. 근 2년간 온갖 정성을 다 했지만 장은 소생하지 못했다. “도화령(桃花嶺) 꼭대기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도화령은 당 중앙과 마오의 거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마오는 “매일 장하오가 우리를 감독하게 하자”며 고집을 부렸다. 중앙대강당에 안치한 후 주더(朱德)·런비스(任弼時)·천윈(陳雲)·예젠잉(葉劍英) 등과 돌아가며 시신을 지켰다. 옌안의 각계인사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마오는 “죽어서 더욱 위대해진 사람”이라는 만장으로 장하오와 이별했다.

다음 날 중앙당교 광장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제주(祭主)는 런비스였다. 리커눙(李克農)이 제문을 읽고 캉성(康生)은 약력을 보고했다. 마오는 “장하오의 죽음은 우리 당의 큰 손실이다. 난감하기 그지없다. 동지들의 심정도 나와 같으리라 믿는다”며 “함께 영구를 메자”고 제의했다. 다들 이의가 없었다. 주더·런비스·쉬터리(徐特立) 등이 나섰다. 그날 따라 비가 내렸다. 언덕을 몇 굽이 넘으며 도화령으로 향했다. 1만여 명이 뒤를 따랐다.

장하오의 본명은 린위잉(林育英)이다. 린위난·린위룽과 함께 ‘린씨 삼형제’라고 흔히들 부른다. 린위룽은 린뱌오의 본명이다.

마오쩌둥이 직접 관을 멘 것은 장하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신을 손수 안장했고 비문도 직접 썼다. 장례식이 끝난 후 공산당에 입당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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