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김정일 총비서의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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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즈음 김정일 (金正日) 총비서는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남쪽이 화해와 협력의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손을 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뿌리쳐야 하는가가 고민이다.

원래 북한은 소련과 중국이 정치 싸움하는 틈바구니에서 양쪽으로부터 경제도움을 받아 왔다.

북한은 이것을 주체라고 불렀지만 실제로 북한 경제는 큰 나라들의 도움에 의존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뒤집힌 것이다.

중국은 시장경제로 돌아섰고 소련은 아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북한은 정신적 충격도 컸지만 경제협력이 끊어진 것이 더 큰 타격이었다.

그때부터 북한 경제는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됐고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몇 년전부터 홍수까지 겹치면서 식량이 모자라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홍수가 났다 해도 돈만 있으면 식량을 수입할 수 있지만 북한은 돈이 없다.

이른바 '주체' 경제가 진짜 주체하게 되면서 망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사정이 이처럼 어려운 때 김정일은 김일성 (金日成) 으로부터 북한통치권을 상속받았다.

사회주의를 한다는 사회에서 통치권을 부자간에 상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동안 '당중앙' 이니 하는, 말도 안되는 말까지 써 가면서 정권을 세습했지만 북한의 어려운 사정을 모를 리 없는 김정일로서는 북한통치권을 인수받은 것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일은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경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경제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

정권을 지키는 일이다.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고도 정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새 한국정부의 '햇볕 정책' 에 대해서도 정권안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일의 고민은 한국정부의 협조정책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경우 경제적 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만,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북한은 남한이 북한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최근에는 '미제' 에 대한 적개심도 많이 완화됐는데 한국까지 적대적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북한사회는 기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문제는 또 하나 있다.

만일 북한이 남북 특사교환에 합의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히 정상회담 문제를 제기하게 되고 정상회담이 열리면 한반도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또 다시 주한미군 문제를 들고나올 수밖에 없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놀라우리만큼 일관돼 왔다.

4자회담에서 북한이 주한미군 문제를 의제에 포함할 것을 주장하는 것도 북한의 일관된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그런데 김정일의 고민은 북한이 주한미군 문제를 들고 나오면 남한은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남한으로부터 경제협력을 받기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협상하는 것은 피하고 비밀접촉을 통해 한반도의 정치적 장래와 평화체제 문제 등을 아예 논하지 말고 경협문제만 다루는 것이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로서는 비밀협상은 정치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북풍사건으로 불신분위기가 팽배한 시기에 북한측과 비밀협상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더욱이 북한이 비밀협상을 통해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어떤 조치에도 합의하지 않고 경협만 합의하게 된다면 한국정부는 매우 심각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김정일은 지금 남한이 또 한번 양보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비밀협상에 응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간다.

식량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경제가 개선될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특사교환 문제와 주한미군 문제를 잘못 다루면 정권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

김정일 총비서는 지금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기 힘든 곤경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고 상황이 개선될 리도 없다.

시간은 김정일의 편에 있지 않다.

하루속히 선택을 해야 한다.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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