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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25. 방콕 아시안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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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1970년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때의 필자.

유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고 귀국했으나 국내 농구계의 시선은 싸늘했다. 젊은 김영기가 대표팀을 꿰차고 있으면 마르고 닳도록 해 먹을 게 아니냐는 비난이 들려왔다. 나는 그 무렵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표팀을 지도하느라 코치 아카데미 과정을 밟을 여유가 없었다. 이를 문제 삼아 대표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도 나왔다. 소속팀인 기업은행 농구단도 '선장'이 자리를 비우다 보니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대표팀 운영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대표팀 감독직 사표를 던졌다. 그러자 이번엔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아시안게임 우승에 자신이 없어 손을 들었다는 말까지 들렸다. 오기가 발끈 치솟았다. 나는 반려된 사표를 찢어 버리고 다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70년 아시안게임은 한국이 유치했다가 경제적 이유로 반납하는 바람에 12월에야 방콕에서 열렸다.

일본은 언제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나는 이자영.최종규.박한 등 2진을 스타팅 멤버로 기용하는 기습작전을 펼쳐 일본의 얼을 빼놓았다. 80-57의 완승이었다. 그런데 방심이 발목을 잡았다. 필리핀에 뜻밖의 1패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필리핀은 이스라엘에 지는 등 이미 2패를 기록해 우승권에서 멀어져 있었다. 우리가 이스라엘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이기면 이스라엘과 동률이 돼 승자승 원칙에 따라 우승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코치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한국의 성적(9위)에 놀라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장신팀과의 경기에도 익숙한 한국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초반부터 점수 차를 벌려나갔다. 2m10cm의 장신 센터가 골밑에 버티고 있어도 김영일은 늠름하게 리바운드를 잡아냈고, 신동파의 슛은 불을 뿜었다. 전세가 우리 쪽으로 기울자 나는 모든 선수를 고루 기용하며 여유있는 경기를 펼쳤다.

경기 종료 1분이 남았을 때였다. 벤치에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인표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당당한 대표팀 주전선수였다. 그런데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국내에서 고려대와 연습경기를 하던 중 다리를 다쳐 경기에 출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방콕까지 함께 오긴 했지만 회복이 늦어져 결국 한 게임도 뛰지 못하고 벤치만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영광의 순간에 그가 코트에 서 있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이인표를 불렀다. 그리고 코트로 나가라고 지시했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얼른 트레이닝복을 벗어던지고 다리를 절룩이며 코트에 섰다. 관중도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뜨거운 박수로 그를 격려했다. 결과는 81-67.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69년 아시아선수권(ABC)대회 우승에 이어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땀으로써 한국 남자농구가 아시아 최강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선수들은 이스라엘과의 경기에서 자기들끼리 '007작전'을 썼다. 나도 경기가 끝난 뒤에야 알았다. 그 작전은 안경을 쓴 이스라엘의 장신 센터를 코트에서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센터 김영일이 수비하는 척하며 손으로 그의 안경을 코트에 떨어뜨리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선수가 발로 밟아 박살냈다. 거기까지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비상 안경을 여럿 갖고 있었다. 결과는 작전 실패였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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