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9개 대기업 … 구조조정 ‘태풍’ 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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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  대기업 구조조정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대기업들의 채권은행들은 25일 구조조정 대상 그룹 9곳을 확정하고, 이달 중 이들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약정에는 자산이나 계열사 매각, 부채와 경비 감축, 사업 철수나 조정 등과 같은 구조조정 계획이 담긴다.

은행들과 금융당국은 어느 그룹이 구조조정 대상인지 실명을 공개하진 않기로 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약정 체결 대상 기업의 명단은 발표할 수 없고, 해당 그룹도 공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9개 그룹은 상당수가 최근 3년 내에 인수합병(M&A)에 성공했거나 새로운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다 금융위기의 후폭풍 탓에 자금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A·B그룹의 경우 지난해 외부자금을 조달해 대형 M&A에 성공했지만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로 ‘승자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다. 외환은행과 산업은행이 각각 주채권은행인 C그룹과 D그룹은 글로벌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산업은행이 담당하고 있는 E·F그룹은 지난해에도 재무 개선 약정을 체결했던 곳이다.

은행들은 또 재무구조 평가에서 불합격(14개 그룹)됐지만 약정 체결에서 제외된 그룹 중 2~3곳과는 자율협약을 맺을 계획이다. 자율협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은행은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약정 체결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9개 그룹 중 6개 그룹의 주채권 은행인 산은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일부 그룹은 구조조정 방안에 동의하지 않고 있어 약정 체결 시점을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중소 건설사·조선사·해운사에 대한 구조조정이 외장부품을 교체하는 수준이라면, 이번 대기업 구조조정은 우리 경제의 엔진을 손대는 데 비유할 수 있다. 또 구조조정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그룹 차원으로 진행되므로 약정의 내용에 따라선 국내 산업계의 지도가 바뀌고, 전반적인 고용 사정 또한 나빠질 가능성도 있다.

물론 삼성·현대차·LG·SK 등 4대 그룹은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채 규모 기준으로 10위권과 11~20위권에서 각각 한 곳, 21~30위권에서 두 곳, 31~40위권에서 3곳이 들어갔다. 그만큼 이번 구조조정의 파급효과는 크다.

그렇더라도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구조조정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구조조정보다는 고용 확보가 우선이었다. 그러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위험이 커지자 방향을 튼 것이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최근 “재무 개선 약정이든 자율협약이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은행장이 분명히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말해 은행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와는 강도나 형식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은행들이 대주주의 경영권을 일단 인정해 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또 실제론 금융당국이 큰 그림을 그리고, 실무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만, 형식은 기업과 은행의 자율에 따르는 것처럼 돼 있다. 이에 따라 외환위기 때처럼 정부가 날을 잡아 한번에 여러 기업을 수술하겠다고 발표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소위 ‘시장친화적’ 구조조정인데, 이 때문에 신속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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