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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정국 권영해씨 파문]사건전말과 주변…조사뒤 화장실서 세차례 할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권영해 전안기부장에 대한 검찰조사는 그가 자진출두한후 13시간동안 큰 어려움없이 진행됐다.

權씨는 자신의 혐의사실을 순순히 시인했고 밤샘 조사를 받으면서도 차분하고 담담한 자세였다.

그러나 구속영장 청구가 가능할 정도로 조사가 완료된 직후 權씨가 할복 (割腹) 하는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출두에서 할복까지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 자진출두 = 權씨가 극비리에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에 도착한 시각은 20일 오후3시45분. 남부지청에서 나온 신상규 (申相圭) 부장검사, 황병돈 (黃丙敦).이상호 (李相虎) 검사와 수사관 등 수사팀 10명은 전 국가정보기관의 장이라는 신분을 감안, 예우차원에서 權씨에 대한 정밀 몸수색을 하지 않고 옷가지와 성경책이 든 가방만을 가볍게 살펴본 뒤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 검찰조사 = 權씨는 조사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대성 (李大成.구속) 전 안기부 해외조사실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윤홍준씨 기자회견에 자신이 연루돼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검찰의 거듭된 추궁에 기자회견 대가로 尹씨에게 25만달러를 주도록 지시한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權씨는 尹씨 기자회견사건 이외의 북풍의혹 사건이나 극비문서 작성경위 등에 대해서는 "국가기밀이라 말할 수 없다" 며 완강히 버텼으며 이 과정에서 權씨와 수사팀간에 밀고 당기는 승강이가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5시간여 조사가 진행된 오후9시쯤 權씨는 "예배를 보겠다" 며 수사검사와 직원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줄 것을 요청했고 수사팀은 權씨가 교회장로인 점을 감안, 직원 1명을 남기고 옆방으로 철수했다.

權씨는 가방에서 준비한 성경책을 꺼내 10여분간 고개를 숙이고 두손을 모은채 기도하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이때 權씨는 가방 바닥에서 길이 10㎝가량의 칼집없는 문구용 커터날을 발견하고 양복속에 숨겼다.

이후 수사팀이 자리를 잡고 다시 조사를 시작, 밤을 꼬박 새우며 피의자 신문과 수차례에 걸쳐 조서작성 작업이 계속됐다.

21일 오전4시쯤 尹씨 기자회견 부분에 대한 조사가 구속영장 청구가 가능할 정도로 마무리됐으나 權씨는 작성된 조서를 꼼꼼하게 읽어 보며 일부 문구의 수정을 요구했다.

조서의 수정이 최종 완성된 시각이 4시30분이었다.

◇ 할복 = 이때 공교롭게도 11층내 컴퓨터 출력장치가 고장나는 바람에 수사팀중 일부는 12층 검사실로 올라가 조서 출력작업을 진행했다.

모든 조사가 끝나 허탈해진 權씨는 5분여간 침울하게 앉아있다가 "화장실에 가겠다" 며 일어섰고 직원 1명만이 화장실 문 앞에 대기했다.

權씨는 곧바로 양복 주머니속에서 문구용 커터날을 꺼내 배를 세차례 그었다.

극심한 고통으로 흥분에 빠진 權씨는 도기 (陶器) 로 된 변기 물통 뚜껑을 세면대에 내리쳐 깨뜨리고 머리로 벽을 들이박으며 자해했다.

대기하고 있던 수사관이 곧바로 뛰어 들어갔으나 權씨는 이미 복부에 피를 흥건하게 흘린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 후송 = 연락은 받은 申부장검사 등 수사관계자들이 사색이 돼 조사실로 뛰어들어왔다.

이들은 당초 權씨가 깨진 변기뚜껑 조각으로 배를 그었다고 판단했으나 뒤늦게 변기 잔해와 핏자국이 가득한 화장실 바닥에서 피묻은 문구용 커터날을 발견했다.

수사팀은 5시5분쯤 검찰청사에서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인 강남성모병원에 연락, 수혈 및 긴급 수술준비를 요청했으며 權씨 가족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權씨는 할복행위후 약 1시간이 지난 오전5시40분쯤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했으며 두차례 수혈 등 긴급조치가 끝난 뒤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權씨는 오전8시 가족 입회하에 1시간40여분 동안 수술을 받았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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