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용 시속 160km 직구, 누구도 보고 치진 못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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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호 24면

인간은 얼마나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을까. 대답은 35년째 똑같다. 1974년 미국의 놀란 라이언(텍사스 레인저스)이 던진 시속 162㎞가 인간의 한계라고 한다. 투구의 한계는 인체뿐 아니라 공·마운드·스피드건 등 여러 변수를 복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예상 수치를 내놓기조차 어렵다.

마운드 위의 영원한 로망, 강속구

미지의 세계는 상상력이 정복한다. 빠른 공을 표현할 때 불이 붙을 것 같다는 의미로 파이어볼(Fireball), 또는 히트(Heat)라는 용어를 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며 스모크볼(Smokeball), 스몰베이스볼(Small baseball)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강속구(强速球), 나아가 빛에 비유해 광속구(光速球)라고 묘사한다.

강한 것을 과시하고 동경하는 건 남자의 본능이다. 타자는 홈런, 투수는 패스트볼로 자신의 힘을 폭발시킨다. 야구팬들은 56년 미키 맨틀(뉴욕 양키스)이 때렸다는 비거리 172m짜리 아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스티브 댈코스키(엘미라)가 던졌다는 전설의 파이어볼을 지금도 얘기한다.

아시아 선수 최고 속도
일본 프로야구 임창용(야쿠르트)은 지난 15, 16일 도쿄 진구구장에서 열린 한신과의 경기에서 최고 구속 160㎞의 빠른 공을 연이틀 던졌다. 지난해 자신이 기록했던 157㎞를 넘어 일본에서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스피드였다. 일본 최고 구속은 마크 크룬(요미우리)이 지난해 찍었던 162㎞다.

일본 야구는 아시아인이, 게다가 오버스로가 아닌 사이드암 투수인 임창용이 160㎞를 넘어선 점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을 대표한 투수들도 160㎞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라부 히데키가 지바 롯데 시절인 93년 158㎞를 기록한 이후 2002년 야마구치 가즈오(오릭스), 2004년 이가라시 료타(야쿠르트)의 속구도 최고 158㎞에서 멈췄다.

한국에서 공인된 최고 스피드는 엄정욱(SK)이 2003년에 던진 158㎞다. 그는 스프링캠프에서 160㎞를 던진 적도 있다. 이 밖에 한기주(KIA), 최대성(롯데) 등이 156㎞를 몇 차례 기록했다. 2000년 이후 한국에서도 힘깨나 쓴다는 투수들은 대부분 최고 시속 150㎞를 넘긴다.

이전 세대에선 선동열(해태)이 95년 기록한 155㎞, 90년 박동희(롯데)가 찍은 153㎞가 대표적인 강속구로 통했다. 지금 필라델피아에서 뛰고 있는 박찬호는 LA 다저스 시절 156~158㎞ 직구를 신명 나게 던졌다. 세대와 리그를 초월한 스피드는 최고의 논쟁 소재다.

기네스북엔 놀란 라이언 162km
이가라시의 인생 목표는 시속 160㎞ 공을 던지는 것이다. 무리한 투구 폼으로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온 힘을 다해 던진다. 김진우(전 KIA)는 2003년 김성한 당시 KIA 감독에게서 야단을 자주 맞았다. 공을 던진 뒤 수비 자세를 취하는 대신 자신의 스피드를 확인하기 위해 등 뒤의 전광판을 돌아보는 버릇 때문이었다. 스피드에 대한 욕심이 투수의 발전을 저해하는 사례는 흔하다. ‘힘 빼는 법을 깨달으면 은퇴할 때’라는 속설도 있다.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열망이 결합한 90년대 후반부터 구속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롭 넨(샌프란시스코)은 97년 월드시리즈에서 164㎞, 조엘 주마야(디트로이트)는 2006년 스피드건에 최고 167㎞ 강속구를 찍었다. ‘100마일(시속 161㎞) 클럽’에 가입한 메이저리그 투수는 19명에 이른다.

이쯤 되면 옛날얘기가 나온다. 놀란 라이언보다 60년대 투수인 샌디 쿠팩스(LA 다저스)가 더 빠른 공을 던졌다는, 메이저리그 초창기 월터 존슨(클리블랜드)의 공은 그보다 더 빨랐다는 주장이 쏟아진다. 여러 증인과 자료로 추정한 전설 속 투수들의 스피드는 135~165㎞. 자료로 인정하기엔 편차가 너무 크다.

댈코스키의 최고 스피드는 110마일(약 177㎞)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댈코스키는 57년 볼티모어팀에서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해 9년간 통산 995이닝을 던져 볼넷 1354개, 삼진 1396개를 기록했다. 형편없는 제구력 때문에 빅리그 마운드엔 서지 못했다. 당대 최고로 빠르기는 했겠지만 스피드건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추정 구속은 신빙성이 없다.

미국선 ‘스피드건 장난’ 논란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빠른 공은 놀란 라이언의 162㎞(100.9마일)다. 기네스북은 라이언 이후의 기록을 아직 공인하지 않고 있다. 요즘 스피드건을 불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90년대만 해도 파이어볼의 기준은 145㎞였다. 10여 년이 지나면서 눈높이가 시속 10㎞ 이상 올라갔다. 투수들의 기량 발전도 있었지만 스피드건의 ‘장난’이 개입됐다는 시각이 있다. 특히 미국이 그렇다.

국내에서도 미국제 스피드건을 사용한다. SK의 문학구장이 J사, 나머지 7개 구장은 S사 제품을 사용한다. J사 제품은 S사보다 최대 4~5㎞쯤 후하게 기록한다. 한기주는 지난해 문학구장 전광판에 160㎞를 찍었지만 공인받지 못했다. 당시 KIA의 S사 제품으로 측정한 한기주의 최고 스피드는 155㎞였다.

박종화 KIA 전력분석팀 과장은 “구장별로 설치되는 3~4개의 스피드건은 공 하나를 각기 다른 값으로 측정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양손에 같은 제품을 들고 스피드를 재도 2~3㎞ 차이를 보인다. 허삼영 삼성 전력분석팀 과장은 “2000년대 초부터 150㎞가 쉽게 찍히는데 이건 90년대 기록과는 다르다. 예전에 썼던 일본의 M사 스피드건은 S사보다 3~4㎞ 낮게 측정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에서 많이 쓰는 J사와 10년 전 사용했던 일본의 M사의 측정 값이 최대 10㎞까지 차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이저리그는 선수와 관중의 흥분을 이끌어 내는 선택을 했다. J사 스피드건을 10여 년간 애용하며 ‘스피드 인플레이션’을 방관한 것이다. 메이저리그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통해 스스로가 만들어 온 환상을 깼다. 메이저리거가 주축이 된 팀들이 한국과 일본에 연전연패했다. 지난 3월 1라운드가 열린 도쿄돔에서 한·일 투수들은 145㎞ 안팎의 공을 던졌다. 그들은 일주일 후 미국에서 155㎞에 육박하는 불을 뿜어냈다. 스피드건 숫자의 허상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강속구의 허와 실
투수판과 홈플레이트의 거리는 18.44m. 투수가 시속 165㎞의 공을 던진다면 0.4초 후 홈플레이트를 통과한다. 155㎞라면 0.425초, 145㎞라면 0.455초가 걸린다.

타자가 투수의 공을 인식하는 데 0.2초 정도가 소요된다. 뛰어난 동체시력(움직이는 물체를 보는 능력)을 타고난 선수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타자는 0.2초 내에 공의 코스와 구종을 판단해야 한다. 타격을 결심했다면 0.2~0.25초 내에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과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메커니즘이다.

155㎞의 공도 때로는 얻어맞는다. 투구의 종속이 떨어졌을 수도, 타자의 노려 치기에 당했을 수도 있다. 일본 최고의 교타자 아오키 노리치카(야쿠르트)는 “공을 보고 때리는 건 아니다. 공이 어디로 올지 예상하고 스윙할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속 160㎞ 공을 던지는 것도, 이를 받아 치는 것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허삼영 과장은 “빠른 공보다 무서운 건 ‘위력적인’ 공이다. 타자가 보기 어려운 각도에서(투구 폼), 하체 힘을 충분히 이용해(공의 움직임), 공을 힘껏 눌러 던지는(공의 회전) 3박자를 갖춰야 완벽한 직구가 된다”고 말했다.

현역 투수 중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한기주다. 가장 위력적인 직구를 던지는 투수는 권혁(삼성)이다. 그러나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투수는 힘찬 직구에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 능력까지 갖춘 류현진(한화)·김광현(SK)·윤석민(KIA)·봉중근(LG) 등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들었다는 놀란 라이언조차 “스피드가 중요한 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위력적인 공을 뿌렸다고 평가받는 선동열 삼성 감독은 추억을 꺼내 놓는다.

“경기 전 몸을 풀 때 공이 아주 잘나갈 때가 있어요. 그럼 ‘너희(타자) 죽어 봐라’ 하고 마운드에 오릅니다. 그런 날은 대부분 내가 죽어서(대량 실점을 하고) 나와요. 내가 노히트노런(89년 7월 6일 삼성전) 할 때는 컨디션이 아주 엉망이었어요. 5회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던졌는데 끝까지 안타를 안 맞더라고요. 허허.”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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