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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정치가 야단맞을 차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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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재벌대표들을 불러 구조조정을 숨차게 요구했었다.

재벌들은 한달도 안돼 모두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가운데는 기조실 (또는 비서실) 을 없애는 일도 포함돼 있다.

재벌의 체질개혁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

총수의 군림적 경영, 식당과 영화관 등 중소기업분야까지 침식하는 팽창주의, 그것도 은행 빚으로 벌이는 경쟁적 사업확장 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재벌의 이런 경영을 누가 도왔는가.

정치권이 그 길을 열어주고 비호했다.

그래서 새로운 재벌정책은 정치개혁이 선행되거나 병행돼야 한다.

재벌이 비판받아야 하고 재벌정책이 바뀌어야 하지만 재벌을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경제의 큰 몫을 이끌어 왔고, 또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벌에 기조실이 있는 게 큰 문제일 수 있는가.

재벌 겁주기라면 몰라도 기조실 해체가 새로운 재벌정책이 될 수는 없다.

단지 기조실 폐지 요구는 재벌총수의 손.발 자르기고, 주력업종에 전념하라는 요구는 재벌의 체중 줄이기인데 재벌들은 지금 그 숙제를 해내기에 진땀을 빼고 있다.

재계의 기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전경련 (全經聯) 과 대한상의 (商議) 는 며칠전 정치개혁안을 여당에 제시했다.

이 안은 정치비용을 줄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의원수를 줄이고, 지구당을 폐지하고, 정당회계의 투명성 확보 등을 건의했다.

비슷한 개혁안은 선관위와 시민단체에서도 제시했다.

정치권은 정치 구조조정을 서둘러 매듭지을 것인가.

정리해고제와 재벌 구조조정은 득달같이 시작됐는데 정치권은 그럴 기미가 별로 안보인다.

구조조정은커녕 총리인준문제로 난투를 벌이고, 무슨 법적 조치라는 것을 취하겠다는 것을 보면 정치개혁은 까마득하다.

재벌이 경영개혁안을 만들자면 얼마든지 시끄러울 수 있다.

노조측과 협의도 해야 하고, 주력업종 선정도 만만치 않다.

기업합병을 위해서는 기업간의 싸움과 흥정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새 정부측에서 눈을 부릅뜨니 아무 소리 못하고 구조개혁에 이미 들어간 것이다.

정치에는 누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가.

바로 국민이다.

그래도 정치인들은 겁을 안 먹으니 그게 바로 문제다.

정치전략에는 흔히 위장 (僞裝) 이 쓰인다.

정치행동의 실제목적과 동기를 거짓목적과 동기의 배후에 은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아채는 위장은 이미 전략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야당의 총리인준 반대는 야당의 결속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그것을 국민이 다 알고 있는데 그 위장을 고집하는 것이다.

여당도, 야당도 국회투표함의 보전신청을 하고 총리서리 임명에 대해서도 적법성을 제기하겠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국민 어느 누구도 법이 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정치하는 사람들만 법적 정의 (正義) 로 위장하려 든다.

유격대원은 야반의 밀림에서 얼굴에 숯칠을 해야 위장의 효과가 있다.

멀쩡한 사람이 백주대로에 숯칠을 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위장이 아니다.

정치행태를 동물학적 요인으로 풀어가는 학자가 있다.

이 학자는 정치행태의 원형을 곤충사회의 유기체적 질서나 고등척추동물의 계서제 (階序制) 로 설명하지만 인간사회에만 있는 정치의식.신념.가치체계는 동물학적 요인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기체적 질서에 집착하는 야당, 준비된 계서에 얽매이는 여당은 동물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있으나 가치의 개념, 정치의식의 수준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노동계가 정리해고제를 눈물로 수용하듯이, 대기업이 질겁하고 구조조정에 나서듯이 이제 정치권이 국민의 야단을 알아들을 차례다.

총리를 누가 맡든 대부분 국민은 그것을 큰 문제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총리가 행정부를 이끌든, 총리서리가 이끌든 그것이 야단날 일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정계가 어떻게 개편되든 별로 상관치 않을 것이다.

더 절박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닥쳐 있는 경제문제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거기에만 매달려주길 바란다.

그 변두리쯤에 있는 문제가 돈 덜드는 정치를 위한 정치개혁이고, 우리들의 새 출발을 위한 의식개혁.문화개혁이다.

핵심과제는 고사하고 변두리의 과제도 외면한 채 얼굴에 숯칠하고 활보하는 정치, 어떻게 야단을 맞아야 하나.

김동익〈성균관대 석좌교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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