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도 외교도 사람부터 낚아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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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명박 대통령이 10~14일 중앙아 방문을 통해 CEO 시절 시베리아·중동에서 익힌 스킨십 외교의 진수를 발휘했다. 초청국 정상과 사우나를 함께 하고,보드카로 러브샷을 하는 파격 의전을 소화했다. 수주도 외교도 '사람의 마음부터 낚는다'는 게 MB식 실전 외교다. 3월 호주 방문땐 케빈 러드 총리의 집에서 심야 술잔도 기울였다.다음은 중앙SUNDAY 기사 전문.


이명박 대통령이 10~14일 중앙아시아 2개국 방문을 통해 보여 준 외교 스타일은 한국 역대 대통령의 정상 외교 프로토콜(의전)에서 확연히 벗어난 것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공항에서부터 이 대통령의 사흘 체류 전 일정을 함께하는 예우를 보였다. 자신의 고향 사마르칸트에선 직접 역사 가이드가 돼 이 대통령을 맞았다.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사저로 이 대통령을 불러 수행원을 모두 물린 채 전통 사우나를 함께했다. 이 대통령은 만찬에서 보드카 폭탄주 ‘러브샷’으로 ‘답례’했다.

사우나를 함께하는 것은 카자흐스탄 문화에 따른 최고의 정상 외교 의전이다. 하지만 이런 파격 의전은 초대받은 정상이 소화할 수 있어야 하고, 쌍방 간 교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대통령은 이번 중앙아 순방을 통해 경제 협력과 외교 지평 확대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 시베리아와 중동·아프리카를 무대로 활동한 경험이 바탕이 된 것 같다”며 “이번 중앙아시아 방문은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의 진가가 발휘된 외교”라고 말했다.

진한 스킨십으로 ‘의기투합’
두 달 전에도 비슷한 의전 파격이 있었다. 이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했을 때다. 3월 4일 호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케빈 러드 총리 주최 만찬이 끝난 직후다. 러드 총리는 이 대통령에게 “저희 집에 가서 애프터 드링크(after drink)를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 식으로 하면 ‘2차를 가자’는 얘기다. 이미 오후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양국 의전 담당자 모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한다. 수행원 없이 통역만 배석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 이동관 대변인 등은 숙소인 하얏트호텔에서 쉬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대통령이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11시30분 정도였다. 호주 측에서도 “총리 회담 의전사상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금융위기 극복 방안과 주요 20개국(G20) 금융정상회의의 장래, 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속 깊은 얘기가 오간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했다. 다음 날 두 정상은 오랜 친구처럼 격의 없는 모습으로 기자회견장에 나섰고, 4월 2일 런던 G20 정상회의에서는 두 사람이 귀엣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수시로 목격됐다.

서울시장 시절부터 이 대통령을 지켜본 여권의 한 인사는 “이 대통령의 외교 철학은 ‘먼저 친구가 돼야 한다’는 것이고, 한 번 만날 때 확실히 내 사람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했다. CEO 시절부터 ‘친구를 얻는 것과 기업의 수주를 따는 것은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과거 CEO시절 해 놓은 일을 국가 간 협력사업으로 추진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9월 러시아와 협의한 시베리아 천연가스 북한 통과 프로젝트는 한ㆍ소 수교 전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합의했던 일. 우리 정부의 지원이 없어 무산된 사안이다. 이 대통령은 수행 인사들에게 1980년대 시베리아 현장을 답사하고 소련 인사들과 보드카를 마셔 가며 협의한 경험을 들려줬다고 한다.

정상 간 거리를 급속히 당겨 놓을 수 있는 ‘파격 의전’은 상대방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동 방문에 앞서 상대국이 그 나라의 최대 의전인 ‘사막 텐트 회담’을 제의했지만 우리 정부가 사양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불편해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또 다른 특징은 상대를 확 끌어당기는 인사법이다. 악수를 할 때도 위에서 내리 잡는 듯 강하게 하면서 앞으로 끌어당긴다. 친하게 된 정상과는 포옹까지 이어진다. 런던 G20 회의 이 대통령 숙소에서 열린 한ㆍ일 정상회담 일화다. 이 대통령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소 다로 총리를 기다렸고, 문이 열리자마자 강한 악수와 함께 포옹으로 맞이했다. 이후 태국 파타야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친구 사이였다.

목표 정하면 계속 반복하는 ‘집중’
정부 부처에 떠도는 말 중에 ‘청와대 퀴즈 대회’가 있다. 외국 방문을 앞둔 이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 및 각 부처 실무진을 모아 놓고 하는 일종의 스터디 회의를 일컫는 말이다. 대통령이 구체적인 질문을 불쑥불쑥 던지고 참석자들이 답변을 하느라 절절매는 상황을 빗댔다고 한다. 부처에서 준비한 자료를 숙독한 뒤 회담 상대방의 특징이나 관심사는 물론 인구, 국내총생산(GDP), 인접국과 국력 차이, 현안 협상이 결렬된 구체적 이유 등을 묻는다. 외교부의 한 국장급 인사는 “회의가 끝난 뒤 녹초가 되더라”고 했다. 일부 장관은 회의 참석 전 참고사항을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서 들어간다고 한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스타일에 대해 일각에선 “디테일에 치중해 남북 관계나 북핵 문제 같은 전반적인 큰 그림을 챙기는 데 소홀한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비판도 나온다.

이번에 중앙아시아 순방에서 이 대통령은 카자흐스탄과 발하슈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사업을 위한 25억 달러 규모의 협력 협의서를 체결했고 잠빌 해상광구 공동 탐사, 무선인터넷(와이브로ㆍWibro) 센터 건립 등 10건의 협력사업 양해각서를 맺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 대통령의 CEO형 외교 스킬 가운데 하나는 ‘집중’”이라고 했다. 카자흐스탄의 국토가 넓고 인구가 적은 점을 포인트로 잡은 이 대통령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한국의 와이브로 기술을 도입하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적극 검토를 요청했다. 발하슈 발전소 사업도 집중 대시의 결과다. 이 당국자는 “와이브로처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사업의 경우 실무 부서에서 상부로 안을 내도 채택되기 쉽지 않다”며 “카자흐스탄과 같은 나라의 경우 최고위층에서 인상을 깊이 받고 결심해야 가능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디테일에 너무 집착, 큰 그림 놓칠 수도
이 대통령의 ‘서바이벌 잉글리시’도 강점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대통령은 완벽하진 않지만 현장에서 익힌 영어를 다른 정상과의 친교에서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사용한다.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중앙아시아처럼 비영어권 정상과의 회담인 경우 통역에 의존한다. 참모들에 따르면 영어권 정상과의 회담에서는 상대방이 얘기할 때는 통역을 쓰지 않고, 자신의 말을 옮길 때만 통역을 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러 번 회담에 배석했던 외교부 관계자는 “통역을 불규칙하게 하다 보니 기록요원이 힘들어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한정된 시간에 밀도 깊은 이야기가 오가는 장점이 있고 상대 정상이 아주 편안해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취임 직후 미국을 국빈 방문,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에서 카트를 함께 타며 한·미 관계 복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런 의전이 다음 달 1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담에선 이뤄지진 않을 것 같다.

우리 정부가 일단 정상회담의 형식을 실무 방문으로 요청해 놓은 것도 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콤팩트한 외교 의전 스타일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임 이후 이어진 대부분의 정상회담 일정이 짧았고, 행사도 단출했다. 4월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의 미·일 정상회담 땐 ‘한 시간 회담’이 행사의 전부였다.

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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