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31>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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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미나미 일본 총독은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강화하라는 훈시를 내렸다. 한반도를 중·일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쿠고조요’의 강력한 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말로 ‘고쿠고’는 국어(國語), ‘조요’는 상용(常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미 ‘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를 가리키는 말이 된 지 오래였다.

천방지축이던 아이들이 무엇을 알았겠는가. ‘고쿠고조요’의 바람은 오히려 히노마루 교실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선생님은 도장이 찍힌 우표 크기만 한 딱지를 열 장씩 나눠 주시며 말했다. “오늘부터 고쿠고조요 운동을 실시한다. ‘조센고(한국말)’를 쓰면 무조건 ‘후타(딱지)’라고 말하고 표를 빼앗아라. 표를 많이 빼앗은 사람에겐 토요일마다 상을 주고 잃은 애들은 변소 청소를 한다. 그리고 꼴찌는 ‘노코리벤쿄(방과후 수업)’로 집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말이 끝나자 환성과 비명소리가 엇갈렸다.

처음엔 서로 쉽게 빼앗고 쉽게 빼앗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쟁은 힘겨워졌다. 조센고를 쓰는 애들은 차차 줄어들고 일본말이 서툰 애들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대일본 제국이 코흘리개 애들을 상대로 펼친 상호 감시와 당근·채찍의 잔꾀는 들어맞는 듯했다.

이윽고 “야!”라고만 해도 후타를 빼앗겼다. 일본말로는 “오이!”라고 해야 한다. 애들은 똥침을 먹여 “아얏!” 소리를 내게 하고는 후타를 빼앗기도 했다. 혹은 화장실 뒤에 숨어 있다가 소리를 질러 놀란 아이들이 “아이구머니” 소리를 내도록 하는 전략도 썼다. “아이구머니”는 조센고가 아니라고 하면 선생님에게 심판을 받으러 간다. “센세이 아이구머니가 니혼고데스카, 조센고 데스카?(선생님, 아이구머니가 일본말입니까, 한국말입니까?)”

아이들은 위급할 때 외치는 소리도 일본말과 한국말이 다르다는 것과 “아이구머니”라는 아무 뜻도 없는 비명 소리가 어머니를 찾는 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고쿠고조요’의 역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강요해도 비명 소리까지 일본말로 할 수 없다는 것과 세 살 때 배운 배꼽말은 결코 어떤 힘으로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아무리 일본말을 잘해도 양호실에 가서 “배가 쌀쌀 아프다”는 말은 죽었다 깨어도 일본말로는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래서 “쌀쌀”이라는 말을 일본말로 “고메고메”라고 한다는 조롱 섞인 농담도 유행했다. 일본말로 쌀(米)은 ‘고메’니까 “쌀쌀 아프다”를 “고메고메 이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난도아이나 푸이푸이푸이토 창고수”라는 아무 의미 없는 해리포터 같은 주문들이 아이들 입을 타고 삽시간에 전국으로 나돌았다. 고쿠고조요의 후타는 일본말도 한국말도 아닌 그 주문 앞에서는 한낱 휴지로 바뀌고 만 것이다.

후타가 모자라는 아이들은 필통을 열어 연필·삼각자·고무 같은 것과 거래를 했다. 표가 남는 아이들은 어느새 고쿠고조요의 상으로 받는 병뚜껑 같은 별 볼일 없는 배지보다는 몽당연필이 낫다는 실리주의를 알게 된 것이다. 약발이 끊어지자 선생들의 탄압도 거세져 매일 교무실에서 호출이 떨어졌고 당시 시오이(鹽井) 일본 교장은 전교생 앞에서 고쿠고조요 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토요일 방과 후 담임선생은 나와 ‘구마’(‘곰’이란 뜻)를 교실에 남으라고 했다. 담임선생은 파랗게 질려 있던 나에게는 시험지 답안을 꺼내 주고는 채점을 하라고 했고 구마에게는 또 꼴찌를 했으니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잘 감시하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원래 구마의 별명은 ‘곰퉁이’였지만 고쿠고조요가 실시된 뒤부터 별명도 ‘구마(곰)’로 바뀐 것이다. 덩치는 우리 반에서 제일 컸지만 하는 일이 둔해 일본말도 가장 서툴렀다. 아이들은 표를 빼앗으려고 늘 상어 떼처럼 이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집에는 할아버지만 있어서 빨리 돌아가야 하니까 제발 표를 뺏지 말라고 조센고로 애걸하다가 다시 또 표를 빼앗기는 아이였다.

한참 동안 빈 교실에서 나는 채점을 하고 있었고, 구마는 선생님이 나가셨는데도 두 손을 든 채 천장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마야! ‘후타’라고 말하지 않을 테니 손 내리고 한국말을 해도 돼.” 그러자 덩치만큼이나 큰 구마의 눈물방울이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어느 교실에선가 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집에서는 한국말로 불렀고 학교에서는 일본 가사로 노래했던 바로 도나부강(다뉴브강)의 왈츠 곡이었다.

풍금 소리는 마치 구마의 허파 속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먼 데서 들렸다. 우리는 풍금을 ‘오르강’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일본말도 한국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풍금 소리는 가사가 없이도 혼자 울릴 수 있으니까 일본말이든 한국말이든 상관할 게 없다. 풍금 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자유롭게 히노마루 교실의 창문을 넘어 긴 복도를 지나 나무들의 긴 그림자가 드리운 텅 빈 교정을 가로질러 날아다닌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구마가 아무리 조센고를 써도 절대로 절대로 ‘후타’란 말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표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곰’은 다시 우리 학급에서 제일 기운이 센 아이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시 총독부 발표에 따르면 ‘고쿠고조요’의 실시로 일반 수강자 수는 21만374명이라고 했다. 그 성과로 간단한 회화 가능자 9만2564명(44%), 가타가나 해득자 15만3572명(73%), 히라가나 해득자 5만8875명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제79회 제국의회(1942년 12월)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실시한 청문회의 기록은 이렇다. “고쿠고조요 실시 후 일부 민족적 편견을 지닌 자들은 조선어는 머지않아 이 지상에서 말살될 것이고 4000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민족의 문화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언사를 농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우리가 식민지 교실에서 배운 것은 히노마루(일장기)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흙으로 된 국토’와 ‘언어로 된 국어’의 두 ‘국(國)’자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중앙일보 고문 이어령

※ 다음 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joins.com/lee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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