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문화혁명]5.혼혈이 강하다…새로운 멀티컬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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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방에 자리잡은 독불 (獨佛)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 중심부에서 버스로 10여분만 달리면 국경인 라인강에 이른다. 독일과 프랑스풍의 문화와 역사를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이 도시에는 '아르테 (Arte)' 라는 공중파 방송국이 자리잡고 있다.

'예술' 을 뜻하는 방송사 이름대로 예술영화.연극.음악회에다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를 전문적으로 내보내는 고급문화방송이다. 특이한 것은 이 방송이 독일에서는 독일어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로 방영하는 독불 (獨佛) 연합방송이라는 점이다.

두 나라 시청자를 고루 만족시키기 위해 프로그램도 폭넓게 채택하며 공동제작도 많다. 그러다 보니 두 나라 문화를 단순히 병렬형으로 세우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복합화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스트라스부르는 독일과 프랑스가 수차에 걸쳐 교대로 점령하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1차 대전 때 독일군으로 전사하고 아버지는 2차대전 때 프랑스군으로 싸웠다는 웃지 못할 사례가 적지 않은 독불 양문화권의 경계지대다.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와 활판인쇄를 개발한 독일인 구텐베르크의 이름을 딴 구텐베르크 광장과 프랑스 장군의 이름을 딴 클레베르 광장이 도시 한복판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부터가 상징적이다. 이런 갈등과 문화권 충돌의 지역이 이제는 아르테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의 피를 섞어 보다 강한 복합문화를 만들어내는, 유럽 문화통합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5개 국어 가능한 비서구함' '3개 국어라도 지원 가능함' 등의 이색적인 구인벽보가 여기저기 보인다.

유럽통합은 이런 식으로 문화통합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프랑스 문화나 독일문화 하나가 아닌 각국의 문화혼혈, 더 나아가 유럽 밖의 색다른 피까지 들여와 완전히 새롭고 한 단계 앞서간 혼혈문화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불해협을 넘어 영국 런던의 서남부 고급 주택지역인 윈저지역. 영국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거처인 윈저성 부근에 스완 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로열 세익스피어 극단에서 수석 부감독을 맡았던 마이클 아텐보로가 연출한 셰익스피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한창이다.

전세계에서 수만 번도 더 공연됐을 연극이지만 관객들은 숨죽이고 무대를 응시한다.맙소사, 로미오가 흑인이다. 줄리엣은 백인이고.

"서로 원수 사이인 캐플릿 가문의 줄리엣과 몬테규 가문의 로미오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을 알려주는데 흑인과 백인의 대비만큼 극적인 것이 없다" 는 게 연출가의 변이다.

흑인 특유의 발성과 행동이 백인들의 그것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전세계에서 가장 알려진 두 커플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인종과 문화권의 충돌과 화합을 상징하는 지구촌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대서양을 넘어 북미대륙의 서쪽 끝, 할리우드의 월트 디즈니사. 이 영화사는 올 6~7월 개봉 예정으로 지금 36번째 장편 만화영화 '뮬런' 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집안을 구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전장에 나가는 소녀 파뮬런이 주인공이다.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중국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92년 전세계에 배급한 '알라딘' 이 아랍인들을 저열하게 묘사했다고 비난받은 것과 비교하면 금석지감이 있다.

디즈니사는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 대부분 백인종만 주인공으로 삼아와 지구촌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백인우월주의의 전세계 이식에 앞장선다는 비난을 받아온 바 있다.

하지만 해외매출이 미국내 매출의 1.5배에 이르자 이에 맞춰 스스로 혁명적인 변화에 나선 것이다.

그 1호로 내세운 것이 95년의 '포카혼타스' .디즈니사의 장편만화영화 사상 처음으로 비 (非) 유럽계인 아메리칸 인디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후 디즈니는 다양한 문화를 고루 다룬 혼혈의 이미지를 얻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비록 백인이지만 앵글로색슨 문화와는 달리 프랑스 문화의 향취를 담은 '노틀담의 곱추' , 동지중해 문화권인 그리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헤라클레스' 가 이어졌다.

이처럼 세계의 대중.상업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고 있는 할리우드의 다인종.복합문화 전략은 이미 대세다. 변화는 '일상의 문화' 의 대표격인 음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는 로스앤젤레스 비벌리힐스에 위치한 오바친 (Oba Chine) 식당. 이 곳에는 '콜드 코리언 누들 셀러드 (Cold Korean Noodle Salad)' 라는 메뉴가 있다. 4.95달러. 당면을 그릇 바닥에 깔고 표고버섯.당근.팽이버섯.빨간 양배추.오이 등의 야채를 넣었다. 표고버섯과 당근과 팽이버섯은 살짝 데쳤고 나머지는 생것이다. 연한 초고추장이 소스로 곁들여진다.

국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음식이다.

이 곳은 태국.중국음식을 연상케하는 요리들도 팔고 있지만 모든 것이 오리지널과는 거리가 멀고 여러 나라의 음식을 뒤섞어 새로운 것을 창조한 리믹스음식, 또는 멀티컬처 (Multi - Culture) 음식들이다. 주인인 볼프강 퍽은 오스트리아인. 그는 "요리는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재료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 캘리포니아는 문화의 혼합지대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음식문화가 융합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이라고 말했다.

동물계에서 서로 다른 종 (種) 이 결합해서 생기는 트기는 생식력이 없고 약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의 혼혈은 강하다. 국가.인종.문화권의 특질을 복합한 문화혼혈의 강한 매력과 전파력은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LA.스트라스부르·런던 = 정명진·채인택 기자·사진 = 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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