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적자늘어도 여유만만…"환난 아시아서 달러 속속 유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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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시아 금융위기와 관련해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9년만의 최고치인 1천1백37억달러에 이른 미국의 무역적자는 올해 더욱 늘어나고 99년에는 2천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확실시된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경제전략연구소 (ESI) 는 올해 무역적자가 지난해보다 5백억달러 더 증가할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최근 “아시아 금융위기로 미국의 무역적자가 더욱 늘어나 성장을 낮추고 실업을 늘리는 것 아니냐” 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80년대초 미국의 무역적자는 세계적 두통거리였다.

요즘과 달리 경쟁력 상실의 위기에 내몰렸던 미국은 재정적자를 동반한 무역적자 속에 달러가 힘을 잃자 재무부 채권을 내다팔아야 했다.

무역적자가 늘어나면서 무역마찰이 심화됐다.

지난 85년 플라자합의의 결과로 나타난 갑작스런 엔고 (高) 나 슈퍼301조 등을 앞세운 통상마찰은 마냥 늘기만 하던 미국 무역적자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지난 80년대초와 확연히 다르다.

대규모 사업재구축을 통해 산업경쟁력을 회복한 미국은 이제 재정적자를 말끔히 치유했고 선진국중 유일하게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다.

현재 미국정부가 무역적자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금리를 건드리지 않아도 해외에서 막대한 자본이 제발로 걸어 들어오고 있기 때문.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까지 미국 자본수지는 무려 1천7백43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것만으로도 지난 한해의 무역적자를 메우고 남는다.

이 때문에 재닛 옐렌 백악관 경제자문위의장은 "올해 무역적자가 더 늘어난다는 것은 미국경제가 더욱 팽창하면서 그만큼 수입수요가 늘어난다는 것" 이라며 오히려 자신감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역적자가 계속 확대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당장 통상마찰의 소지가 커지고, 8년째 이어지는 장기호황이 언젠가 꺾일 때 세계경제가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무역적자와 관련해 미국정부의 가장 큰 관심은 아시아권과의 교역이다.

일본.중국과의 무역적자가 지난해 더 늘어난 데다 아시아 위기로 인해 한국.태국 등의 평가절하가 미국의 무역적자를 더욱 키우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이와 관련해 미국 상무부 차관대행인 리 프라이스가 지난 19일 무역수지 브리핑을 통해 언급한 한국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는 “아직 아시아 위기가 무역수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면서도 “인도네시아와는 도리어 흑자가 늘었고 태국과는 별 변화가 없지만 한국과는 위기 전부터 이미 흑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고 말했다.

대부분의 미국언론들도 한국과의 교역상황 반전을 따로 꼬집어 부각했다.

다만 아직 한국과의 통상마찰이 본격화할 조짐은 없다.

한편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은 최근 “아시아와의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지원은 계속한다” 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샬린 바셰프스키 미국무역대표부 (USTR) 대표의 말처럼 “미국의 주된 시장인 아시아가 미국상품을 살 수 없다면 미국은 아시아에 상품을 팔 수 없기 때문에 국제통화기금 (IMF) 을 통해 도와야 한다” 는 뜻이지 미국의 이익을 희생하며 '선행을 베풀겠다' 는 것은 아니다.

워싱턴 =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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