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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고전, 포르노, 정치자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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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반대로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다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거의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포르노’가 그것이다. 실제로 성인들 중에 포르노를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일 있다면 “나는 축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비율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고전과 포르노의 공통점은 부끄럽다는 것인데 고전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고, 포르노는 너무 많이 봐서 그렇게 느낀다.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은 고전처럼 대하고 어떤 사람들은 포르노처럼 대하는 것도 있는데 ‘정치자금’이 그것이다. 대중에게 정치자금은 ‘고전’ 같은 것이고 정치인에게는 ‘포르노’ 같은 것이다. 대중은 정치자금에 대해 거의 모르면서도 마치 잘 아는 듯 엄밀한 도덕적 잣대로 비판한다.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에 대해 너무나 잘 알지만 누구도 꺼내놓고 말하지 않는다. 대하는 태도와는 반대로 대중은 정치자금을 포르노처럼 역겹게 생각하고, 정치인은 고전처럼 귀하게 생각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돈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지만 정치인은 특히 더하다. 돈 때문에 감옥에 다녀온 정치인도 꽤 되지만 웬만한 정치인치고 돈 때문에 검찰에 불려가지도 않고 정치하기란 정말 어렵다. 전직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교육감 등 우리가 직접 뽑은 사람들이 우리가 직접 뽑지 않은 검찰에 쉴 새 없이 불려 나간다. 누구나 돈 문제로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법이란 현실적이어야 한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너무 멀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한다.

지금의 정치자금법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예컨대 교육감 선거의 경우는 30억~40억원의 선거비용이 필요하지만 단 한 푼의 후원도 받을 수 없다. 결국 자기 돈으로 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빌려와야 한다. 이것은 부자만 정치를 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나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도 공식적으로 후원회 구성이 허용되는 시기(그나마 기간이 너무 짧고 후원금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가 되기 전에는 어떤 후원도 받을 수 없다. 역시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불법으로 받아야 하는데 불법적으로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빌린 돈조차 검찰의 판단에 처분을 맡길 수밖에 없다. 비(非)선출 권력(검찰·법원·선관위·국세청)이 선출 권력(대통령·국회의원)을 마음만 먹으면 사법처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다.

현실적이고 합법적인 정치자금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모든 정치인은 정치에 입문하는 순간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이미 입문한 정치인들은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리스트에 이름이 나올까 벌벌 떨 수밖에 없다. ‘모든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닌 현실이다. 정치는 도덕군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를 고치지 않고 정치인의 ‘도덕성’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미국도 불법 정치자금을 현금으로 맘대로 받아 실컷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의 수사 중에 발견된 불법 현금 다발이 계기가 돼 정치자금에 대한 제도를 근본적으로 혁신했다. 정치자금을 누구나 합법적 틀 내에서 투명하게 걷어 투명하게 쓰기만 한다면 사실상 무한대로 쓸 수 있도록 허용했다. 미국은 그것을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정치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포르노 수준의 ‘외설’ 취급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더 리더’에는 남녀 주인공의 성기가 정면으로 나오지만 누구도 외설로 보지 않는다. 대중의 혐오를 받는 정치도 멋진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금이 정치자금 제도를 개선할 기회다. 우리도 박연차 게이트에서 뭐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