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위에난 지음 '진시황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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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진시황은 단순히 법가 (法家)에 의한 공포통치와 몇 가지 술수로만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했을까. 후세 사가들이 남긴 기록만을 보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 74년 중국 산시성 (陝西省) 진시황릉 부근에서 발굴된 병마용갱 (兵馬俑坑)에서 새로운 사실을 읽어낼 수는 없을까. 중국의 기록작가인 위에난 (岳南) 이 발굴작업 기록과 관계자를 인터뷰해 쓴 '진시황릉' (일빛刊) 은 병마용갱에서 나온 물증을 바탕으로 폭군으로만 알려진 진시황에 대한 기존 시각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발굴기록과 사료를 비교해가면서 '갑옷을 입고 최고의 무기로 무장한 위풍당당한 8천여 명의 병사' 는 당시 실용문화의 상징이라고 단언한다.

병마용 (兵馬俑) 의 사실적 표현예술, 도기제작술, 구리로 만든 마차인 동거마 (銅車馬)에 나타난 야금주조기술, 청동검의 부식을 막기 위한 크롬도금 등은 당시의 과학기술공예 수준이 세계에서 최고였음을 말해준다는 것. 때문에 진시황 시대 진나라 문화는 분서갱유 (焚書坑儒) 로 상징되는, 인간을 억압하는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실리에 바탕을 둔 실용주의 문화로 봐야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기에 덧붙여 진시황은 인재를 고르는 능력, 제도와 시스템 마련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물질문명의 힘을 조직화함으로써 통일을 일궈낸 합리적인 지도자의 본보기라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발굴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중국문화를 허난 (河南) 성 북서쪽의 한구관 (函谷關) 을 경계로 서쪽에 자리잡은 진나라의 실용적인 관서 (關西) 문화와 동쪽의 사변적인 관동 (關東) 문화로 나눈다.

그러면서 진나라 멸망 이후 들어선 한나라가 관동문화권의 유가 (儒家) 를 최상의 정치이념으로 채택함에 따라 중국문화가 현실적인 과학기술 대신 통치술에 치중한 나머지 허약체질이 됐다고 주장한다.

다소 비약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거대한 중국이 19세기에 들어서 서양으로부터 화염세례를 받게 된 것도 거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병마용이 손빈의 팔진법 (八陣法) 중 기러기가 떼지어 나는 모습처럼 비스듬히 줄지어 적을 공략하는 안행진 (雁行陣) 의 배열을 짓고 있다는 사실 등 다양한 연구결과와 분석도 곁들이고 있어 흥미롭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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