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업자'도 만나는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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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가부도 일보전에 다다랐던 우리나라의 환란 (換亂) 은 지난달말 뉴욕 외채협상타결로 발등의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지난 30년의 국제금융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대개 10년에 한번꼴로 닥쳐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70년대초에는 고정환율제도인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석유값 파동으로 국제금융계가 소동을 치렀고, 80년대초부터는 중남미에서 시작된 후진국 부채위기로 또 한번 법석을 떨었는데,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멕시코와 동남아의 외환위기를 당하게 됐다.

70년대와 80년대의 국제금융위기는 우리나라에 별로 큰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태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이상한 것은 외환위기의 험한 풍랑 속을 항해하는 한국호 (號) 의 선장인 현직 대통령은 청와대 숲속으로 피신한 듯 자취를 감춰버리고, 선거가 막 끝나면서부터 취임을 두달 이상 남겨둔 대통령당선자가 대리선장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국제금융위기는 고도의 전문성과 기민한 대응책을 요구하는 상황인데 평생을 야당 정치인으로 투쟁해 온 대통령당선자가 현직도 맡기 전에 과연 건국이래 가장 큰 경제환란을 실수없이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한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당선자는 이번 외환위기를 마치 수십년 이 분야를 공부해 온 프로같이 기동성있게 대처함으로써 과연 '준비된' 대통령후보였음을 보여줬다.

물론 우리나라 경제위기는 이제가 시작이라 할 정도로 앞으로 더 험난한 고비들을 넘어가야 하겠지만 최소한 우리는 위기해결의 실마리는 잘 잡은 것 같다.

이러한 희망적인 사태진전은 차기 대통령의 특유한 통치스타일에 크게 영향받았다고 본다.

첫째, 그는 자신이 직접 문제점들을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현 위기를 해결하는 신선함을 보였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강당만한 드넓은 청와대 대접견실 한쪽끝 상석에 도도히 앉아 몇m 멀리 떨어져 도열해 앉아 있는 관계 각료들에게 "만전을 기하라" 등의 밑도 끝도 없는 '어명 (御命)' 을 던지는 것에 한정된 느낌이었다.

반면에 차기 대통령은 비좁은 접견실에서 보고하러 온 경제각료들과 회의 테이블에 함께 앉아 대책을 숙의하고 때로는 도시락까지 같이 들면서 경제위기를 토의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둘째, 차기 대통령은 현재의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시간을 내 기꺼이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을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다.

37년만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며 외국 방문객들을 딱딱한 공식적 대면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만나 환담할 수 있는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권력층, 특히 정부관료들은 외국인 기피증에 빠져있는 듯 행동해 왔고 그래서 많은 손해를 보았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외국인들의 습성을 잘 알지 못해서인지 우리 정부관료들은 외국손님들을 잘 만나려 하지 않았으며, 또 열등감에서 나온 거만함으로 외국인들 특히 외국의 민간금융인들을 업자라고 박대하기 일쑤여서 국제금융인들의 불평이 많았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오늘날의 '업자' 가 내일의 최고 정부관리가 된다는 것을 우리 관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사업가로서, 금융인으로서 또는 대학교수로서 성공한 인물들을 대통령이 삼고초려 (三顧草廬) 해 워싱턴으로 모셔오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사업과 연구생활을 잠시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순수한 봉사정신으로 일하다 4년후면 다시 본래의 직업으로 귀환하는 것이 상례로 돼있다.

우리나라 관료들은 관에 몸담지 않은 사람들은 만나주지도 않는 등 거만을 떨다가도, 그들이 미국의 고위직 각료가 돼 내한하면 비굴할 정도로 그들 앞에서 헛웃음을 치는 것을 보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차기 대통령은 이런 외국의 '업자' 들인 민간금융인들도 비좁은 경기도 일산 자택의 응접실 등 아무곳에서나 스스럼없이 만나 그들의 의견과 협조를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 정부관료들도 제발 이번 위기를 계기로 관에 있다는 헛된 우월감과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로 국내외 '업자' 들을 자주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박윤식〈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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