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신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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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14면

아이들도 나가고 아내도 외출한 휴일. 남편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맨다. 오지은 2집의 ‘웨딩송’을 들으며 우리도 예쁜 노부부가 될 수 있겠지 생각하다가,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를 읽으며 잠시 ‘아내 이후’를 상상한다. ‘아내 이후’는 혼자 있는 휴일처럼 난감한 시간이리라. 아내에게 ‘남편 이후’는 유쾌하고 신나는 시간일 텐데.

남편은 모른다

나는 아내가 아끼는 커피를 한껏 내려 마신다. 아까워할 아내의 얼굴을 생각하니 맛과 향이 더욱 진하고 고소하다. 명랑해진 남편은 청소기를 꺼내 방과 거실을 민다. 그러다 현관에 놓인 아내의 신발을 본다. 좀도둑처럼 커다란 남편의 구두 곁에 형사처럼 다부진 아내의 운동화가 놓여 있다.

아내의 발은 작고 통통해 마치 아기 발 같다. 신발은 발을 기억한다. 아내의 오른쪽 신발은 앞쪽 중앙이 약간 튀어나와 있다. 아내의 오른쪽 둘째·셋째 발가락이 위로 조금 솟아 있기 때문이다. 두 발가락은 쌍둥이처럼 닮았고 사이도 좋은지 발가락 간격이 좁다. 남편은 그 발가락들을 귀여워했지만 아내는 부끄러워했다.

연애할 때 둘은 즐겨 술을 마셨다. 취하면 아내는 잘 웃었다. 이효리보다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스무 살 아내는 스무 살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꾸 발가락이 간지러워.” 그렇게 말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결혼 후 그 간지러움이 오른쪽 두 발가락 사이의 무좀 때문이란 것을 알 때까진 말이다.

영화 ‘접속’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친구와 함께 사는 수현(전도연 분)은 친구의 애인인 기철(김태우 분)을 짝사랑한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기철 때문에 잠깐 밖에 뭐 사러 나가던 수현이 현관에 놓인 기철의 큰 구두를 보고 거기 자기 발을 살큼 넣어 보는 장면을 나는 좋아했다.

영어에 ‘Just put yourself in my shoes.’라는 표현이 있다. ‘너도 내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랑이란 게 그렇게 그 사람 신발에 자신을 넣어 보는 일은 아닐까. 자꾸만 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하게 되는 일은 아닐까.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고 싶다. 아내의 신발에 자신의 큰 발을 집어넣어 본다. 잘 안 들어간다. 역시 무리인가. 남편은 발을 빼려는데 이번에는 또 발이 잘 안 빠진다. 그때 외출했던 아내가 집으로 들어온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글쎄, 나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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