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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이공계] 3. 산업 현장의 엇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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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이공계 인력은 넘치는데 입맛에 맞는 사람이 없다는 기업들의 불만이 많다. 사진은 대전에 있는 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가 채용한 러시아 기술자들이 한국인 직원과 일하는 모습. [대전=신인섭 기자]

교통카드 등에 쓰이는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업체인 키스컴은 요즘 석.박사급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다. 이 업체가 개발하는 기술은 교통카드뿐 아니라 상품에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무선 칩을 붙여놓으면 쇼핑 상황을 쇼핑객이나 매장 주인 모두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등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다.

키스컴 측은 "국내에서는 우리 회사에서 필요한 석.박사를 찾을 수 없다"며 "일부 대학원에서 비슷한 인력을 배출하지만 딱 맞는 사람을 찾기란 극히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결국 눈을 돌린 곳이 우크라이나였다. 친분이 있는 러시아 차관급 인사가 다리를 놔줘 우크라이나에서 전문가 세 명을 뽑을 수 있었다. 이들 세 명은 1990년을 전후해 옛 소련과 러시아에서 활약하던 전문가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대학원에서 이들을 따라잡을 만한 전문가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회사 측은 지적한다.

첨단 기술을 다루는 기업일수록 이처럼 "국내에는 우리 입맛에 맞는 이공계 인력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현장에서 필요한 전문가 없어=카메라폰용 반도체 칩을 만드는 엠텍비전(서울 금천구)도 연구.개발 인력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이 업체는 반도체 칩 판매만 올 들어 1000만개를 돌파했다. 올 매출 목표는 1500억원. 그러나 설계 분야 등 연구인력이 부족해 비상이다.

기술연구소의 전한철 소장은 "현재 연구원이 60명인데 두배인 120명은 있어야 한다"며 "사장은 더 뽑아 쓰라고 했지만 쓸 만한 사람을 구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의 이공계 졸업생은 그대로 현장에 투입할 수 없다"며 "신입사원을 뽑아 최소한 3년 정도 키워야 하는데 중소기업으로선 부담이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런 실정은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삼성그룹의 인사담당자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매년 6000여명의 공대 출신을 신규 채용해 재교육시키는 데만 연평균 800억원을 쓴다"고 말했다. 한 사람당 연간 1600만원의 재교육 비용을 쓰는 셈이다.

◇기능인력도 수급불균형=완성차 업체에 엔진 부품을 납품하는 A사는 숙련공이 없어 골치다. 이렇다 보니 최근 불량률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완성차 업체가 요구하는 부품 불량률은 1%대다. 당연히 납품 전에 불량 제품을 골라내는 인력과 장비가 더 필요하고, 비용도 덩달아 늘 수밖에 없다. 이 업체는 2,3년 전만 해도 내부 불량률이 1% 안팎이었다. 그런데 숙련공들이 부족해지면서 내부 불량률이 급상승했다.

회사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가 요구하는 불량률 수준을 맞추려면 10년 이상 된 숙련공이 50명 필요하지만 그 절반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숙련공의 주류를 이루던 공고 졸업생을 신입사원으로 뽑는 것도 포기했다. 오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2년 전만 해도 공고 출신이 20여명이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지난해 그만뒀다. 단지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다.

요즘 모집공고를 내면 4~5명씩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몇 달 못 견디고 그만두기 일쑤다. 숙련공으로 키우고 축적된 손끝 기술을 전수해 주는 것은 꿈도 못 꾼다는 설명이다.

회사 관계자는 "우리가 월급이 적은 것이 아니다. 입사 후 6개월이면 야근비 등을 포함해 연봉이 2000여만원"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쓰고 있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아 제대로 된 기술을 가르쳐 줄 수가 없단다. 많은 부분을 자동화했지만 수십년간 쌓은 노하우는 기계로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해법이라고 찾은 것이 중국 베이징(北京) 인근에 공장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회사 측은 "중국은 자동차 부품 등 생산기술이 우리보다 5년 정도 뒤떨어져 있으나, 숙련공이 많아져 우리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말했다.

◇고령화하는 기술인력=기업의 기술직 인력 평균 나이를 보면 현대중공업 42.6세, 대우조선해양 42세 등으로 이미 40대를 넘어섰다. 기술 업종은 3D(힘들고 어렵고 더러운)업종이라는 인식 때문에 젊은이들이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십년간 축적된 기술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반월.남동공단 등의 경우 주물.금형 등 기반 기술을 다루는 사람 가운데 50대 미만이 거의 없을 정도"라며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1대 1 방식으로 가르쳐 주는 도제식 교육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은 '기술전수 의무화 조항'을 사내 규정으로 만들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20~30년간 현장에서 일한 숙련공은 '기술 전수기간'을 뒀다. 퇴직을 5년 남겨 둔 기술자는 후임자를 가르쳐야 한다.

현대중공업 등은 LNG선박 등 특수용접은 기술유지 차원에서 협력사에 맡기지 않고 있다. 신입사원(연간 200명)을 뽑아 집중 교육을 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장석민 선임연구위원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 기술정책 부재로 40대 미만의 산업인력이 거의 없는 이른바 '기술 구멍'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기업들도 이공계 인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시래(팀장), 염태정.심재우.강병철(산업부), 김남중.강홍준.하현옥(정책기획부), 김방현(사회부)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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