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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답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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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대통령께서는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4년 전 평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날 때 방북의 용기를 치하했다. 그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를 염두에 두고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이 표현은 운율과 의미에서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서서'의 마지막 구절을 연상시킨다.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잠자기 전에 몇 마일 가야 한다/잠자기 전에 몇 마일 가야 한다." 시의 정조는 명상적이고 서정적이다. 하지만 거기엔 스스로 정한 인생의 아름다운 약속을 지키려는 사람의 의지가 깔려 있다.

힘든, 두려운, 무서운 일은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 것과 통하는 경우가 많다. 인생과 역사의 가치있는 성취들은 앞이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출발하곤 했다. 용기로 두려움을 이기고 인내로 힘듦을 견뎌야 했다.

평양의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김 전 대통령에게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자신이 체제이고 정권인 김 위원장에게 서울행은 힘들고, 두렵고, 무서운 길일 것이다.

지난달 정상회담 4주년 기념행사차 서울에 온 북한의 고위급 인사가 "남한에 국가보안법도 있고 여론도 이런데 이런 험한 분위기 속에서 내려올 수 없다"고 한 말에서 김 위원장의 두려움이 읽혀진다. 그런데 김 위원장보다 열일곱살이 많은 김 전 대통령은 남한의 공산화를 규정한 북한 노동당 규약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방북을 결행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 앞에 참배할 것을 김 위원장이 요구하는 바람에, 그와 같은 차를 타고 평양의 환영인파에 손을 흔들면서도 엄청난 중압감에 사로잡혔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젠 김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의 용기를 따를 차례다. 서울에 그를 교활하고 이기적이며 인민을 굶기는 잔인한 독재자라는 여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반도 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북한 인민을 살리기 위해 그는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용기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