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혜로운 살림 문화 보여줬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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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재씨가 보자기로 외출용 가방 만드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진하 여성중앙 기자

“나 혼자 두 시간씩 어떻게 얘기를 하죠? 아무래도 밥 먹는 시간을 당겨야겠어요.”

한복디자이너이자 보자기 아티스트인 이효재씨(52)는 연방 시계를 보며 같은 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늘 하던 일이지만 유난히 이날 손님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 눈치다. 4일 오전 10시 30분. 이씨가 운영하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 앞 한복집 ‘효재’를 방문한 주인공은 13명의 외국인이었다. 서울시가 열고 있는 ‘하이서울페스티벌’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온 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의 신문·잡지 기자들이다. 이달 1일에 입국해 그동안 ‘프레스 투어’ 일정에 맞춰 서울 시내 고궁과 쇼핑 타운을 둘러보고 불고기·비빔밥을 비롯한 한식을 맛봤다. 그리고 오늘은 ‘한국의 맛과 멋’이라는 주제로 직접 문화체험을 하기 위해 이효재씨를 찾았다.

『효재처럼(자연으로 상 차리고 살림하고)』『효재처럼 보자기 선물:마음을 얻는 지혜』의 저자인 이씨는 “의식주는 한 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입는 것, 먹는 것, 집 꾸미기까지 그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자연과 벗삼는 생활이자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느끼고 즐기며 사는 것이다. ‘살림’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지혜로운 살림꾼으로 통하는 그에게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 ‘한국의 타샤 튜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집이 외국인들로 늘 붐비는 것도 같은 이유다. 마음 푸근한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느끼는 거예요. 서서히 스며드는 거죠.”

그래서 보자기의 유래나 용도를 설명하기보다 보자기와 고무줄을 이용해 티슈 상자를 싸는 방법부터 가르쳤다. “재미가 붙어야 귀도 기울이죠”라는 게 그의 전략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 하던 기자들은 맘 먹은 대로 안 되는 듯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지금 만든 것을 풀어서 탁탁 털어보세요. 한국에서는 이렇게 보자기를 털면 나쁜 기운도 함께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했어요.”

겨우 만든 ‘작품’을 풀어야 된다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나쁜 기운을 털어낼 수 있다는 말에 기자들은 아이들처럼 웃어댔다. 이들은 배낭, 미니 가방, 모자까지 만들었다. 방콕 포스트의 스리사몬(42) 기자는 “네모난 보자기 하나로 이렇게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다니 한국인의 지혜로움을 새삼 느꼈다”며 즐거워 했다.

어느새 거실 옆 주방에서 연잎밥 찌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기 시작했다. 외국 기자들은 “웃느라 힘들어서 배가 고프다”며 식사부터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의 메뉴는 연잎에 싸서 찐 찰밥이 메인이다. 먼저 애피타이저 개념으로 김 가루를 묻힌 가래떡을 내왔다. 그리고 소나무 가지와 함께 찐 저민 돼지고기와 알타리 무김치가 반찬으로 나왔다. 마당에 묻어 둔 독에서 10년 묵은 된장도 상추·깻잎과 함께 내놓았다. 후식은 잘 깎아 놓은 오이와 방울 토마토였다. ‘한국 전통의 맛’ 하면 쉽게 떠올릴법한 한정식도 그렇다고 궁중 요리도 아닌 메뉴들. 게다가 손님들은 모두 큰 식탁에 둘러서서 놋그릇에 조금씩 덜어가며 먹는 스탠딩 뷔페로 식사를 했다.

이씨는 “센 맛보다 섬세한 맛이 필요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나무 가지와 함께 찐 돼지고기는 만드는 방법이 자연에 가까이 가 있다고 했다. 빨간 알타리 무와 초록 오이, 상추, 깻잎의 색 어울림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예쁘다.

“예전에 서양 요리 18가지 정찬 코스를 먹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내가 뭘 먹었는지 기억을 못 하겠더라고요. 음식은 가짓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맛있게 기억할 수 있는 것, 그게 중요하죠.”

그는 식탁 메뉴가 다섯 코스를 넘지 않는 게 좋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면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도 확실하고, 주부들이 설거지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남는 음식이 적어져 친환경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거다.

“한국인은 손님이 오면 이렇게 뭔가 싸주길 좋아해요. 손님을 그냥 보내면 ‘기둥이 운다’고 하죠. 돌아가서 보자기를 꼭 한 번 다시 싸보세요. 한국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빛깔 고운 보자기로 싼 티슈 상자를 가슴에 안은 기자들은 소중한 ‘한국의 정’까지 가득 선물 받은 듯 활짝 미소 지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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