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IMF와 한국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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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연말 세기적 전환기의 한국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선택하는 긴 과정이 끝났을 때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향한 또 하나의 획기적 전기가 이룩됐다.

한국인들은 건국 50년만에 처음으로 기존 선거지형 아래에서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그러나 축제는 없었다.

한국인들은 좌절과 분노 속에 국가부도의 벼량 끝에서 국제통화기금 (IMF)에 의한 강제적 구조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IMF 개혁이 한국경제를 위한 '쓴 약' 이라는데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으나 IMF 개혁이 한국 민주주의에 미칠 영향에 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나오고 있다.

IMF가 주도하고 있는 개혁은 우리가 구호로만 추진해 왔던 세계화를 강제적으로 실시하려는 것이다.

기실 세계화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제도.규범과 관행을 전세계적으로 보편화시키려는 운동이다.

자본이 국경의 장벽없이 이윤을 찾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경제구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IMF 개혁이 실시되면서 우리는 세계화의 참 모습을 대면하고 있다.

서울에 국제적 증권투자가.외환거래인.다국적 기업간부와 같은 글로벌한 경제행위자들이 넘나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글로벌한 경제행위자들이 시민들의 경제생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시민들에게 책임을 지도록 강요할 민주적 통제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들과 정부는 선거에 의해 시민들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언제라도 투자환경이 좋은 곳으로 자본을 이동시킬 수 있는 이 '발없는 자본' 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시민들은 갖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더 좋은 조건을 제공하려는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글로벌 자본에 더 낮은 임금, 더 낮은 세금, 더 열악한 노동조건, 더 느슨해진 환경규제를 제공하기 위해 경쟁하는 '바닥을 향한 경주' 에 우리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시민들이 소득재분배.사회복지.환경의 설계와 같은 삶의 조건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지 못하고 이러한 외국 투자가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IMF 개혁은 우리의 민주주의에 긍정적으로도 작용할 것이다.

IMF 개혁은 오랫동안 우리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아 왔던 정경유착 구조를 해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관치금융 아래서 소수의 재벌에 투자자원이 집중됐으나 그들에게 투자실패에 대한 처벌이라는 기율은 가해지지 않았다.

도덕적 해이가 발생했고 과잉투자.중복투자.차입경영 등 한국경제를 병들게 한 요인들이 누적돼오다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IMF 요구에 따라 금융과 산업이 외국자본에 개방되고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 움직이도록 조정된다면 자원의 배분은 투명해질 것이고 정경유착이나 담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운영에 시장경제 원리가 투입된다면 더 효율적이고, 경쟁력이 있으며, 유연하고, 책임소재가 분명한 정부로 변모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IMF 개혁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IMF에 의한 강제적 구조조정은 한국에 있어 제2의 개항 (開港) 이다.

한세기전 우리 조상들이 역사를 준비하지 못한 결과로 외부에 의해 개항을 강요당했던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고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면 외부세력의 손을 빌려서라도 단행해야 하는 것이다.

전후 일본의 개혁을 위해 맥아더 군정이 필요했듯이 우리의 개혁을 위해 IMF라는 외부세력이 나타나 주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 모른다.

그러나 개혁은 공짜 점심이 아니다.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개혁을 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와 양립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된다.

임혁백<이화여대 정치학 교수>

◇ 필자 약력

▷46세▷서울대 정치학과 졸.미국 시카고대 정치학박사▷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현) ▷저서 : '시장, 국가, 민주주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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