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로 읽는 사진이야기]中.증언하는 영상의 위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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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다 낡아빠진 중절모에 우그러진 식기를 앞에 놓고 상념에 잠긴 중년남자를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은 힘들고 거칠었던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의 한 상징처럼 돼버린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미국의 여류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 (1895~1965)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는 사진의 정직성이 사회 현실과 결합해 낳은 다큐멘터리 사진으로서 이만한 찬사를 받은 사진도 아마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은 하마터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장될 뻔 했다.

1932년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던 도로시아 랭은 다른 예술가들처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아이들은 하숙집에 남겨놓고 화가였던 남편과 함께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날이 많았다.

무료급식소는 그녀의 작업실 이웃에 있던 한 부잣집 아주머니가 임시로 차린 것이었다.

그녀 또한 이곳을 자주 이용했는데 어느날 급식줄에 끼여들었다가 무심코 셔터를 누른 것이 이 사진이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그녀는 현상한 필름을 까맣게 잊고 지냈고 그녀의 작업실을 늘상 드나들던 동료 한 사람이 한참이 지난 뒤 그녀의 묵은 필름을 뒤지다 우연히 이것을 찾아냈다.

동료의 손에 인화된 사진 '무료 급식소' 는 훗날 궁핍한 시대를 증언하는 걸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사진과 아울러 그녀가 활동했던 단체 역시 세상의 조명을 받았다.

도로시아 랭이 소속한 단체는 미국 농업안정국 (FSA) .다큐멘터리 사진의 역사 속에 그 활동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경제 대공황기에 미국을 다큐멘터리 사진의 성지처럼 올려놓은 곳이 바로 FSA였다.

FSA은 보조금을 주면서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했는데 로이 스트라이커가 그 홍보를 맡았다.

그는 1930년대 초부터 1943년까지 12명의 빈곤한 사진가들을 선발해 농업안정국 활동의 홍보용 사진을 찍게 했다.

이들이 사용한 필름 원판은 27만매에 달했고 총 소요예산은 공황 중에도 1백만달러가 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공황기에 농민들이 처한 현실을 꾸밈없는 사진으로 소개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그의 지휘는 주효했고 FSA 소속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말해주는 사진사적인 평가를 받았다.

말하자면 대공황 속에서 관료주의가 이룩해낸 기적이었다.

탁월한 지휘자의 조율과 지휘가 있었지만 사실 이 프로그램의 실현은 뉴딜정책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가진 구소련과의 경쟁심이 한몫 했다.

앞서 1920년대 후반 구소련은 신경제정책을 펼치면서 수많은 사진가들을 동원했다.

신경제정책 아래 행복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하고 밝은 삶과 노동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 소련인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은 역동적 이미지를 극적인 구도 속에 담고 있을 때 미국인들은 우울하고 참담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카메라 앵글에 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평가는, 결코 자랑하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았던 미국쪽에 손을 들어줌으로서 끝났다.

이런 초창기 경험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는 사진가들이 어둡고 그늘진 세계에서 소재를 찾는다는 전통이 자리잡게 됐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구소련이든 미국이든 당시의 사진가들은 궁핍했다.

소련의 사진가들은 재료를 극도로 아껴써야 했고 미국에서는 사진가들 자체가 극빈자 신세였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진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사진가들이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빈곤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진가들은 정치적 계획 아래 조직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작업을 했다.

섬광조명에 놀라 토끼눈을 한 뉴욕 빈민들을 촬영해 세상을 놀라게 한 제이콥 리스 (1849~1914) 는 미국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닌 최초의 경찰 출입기자였다.

그의 사진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뉴욕 경찰시장의 후원을 받았는데 경찰서장은 나중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 뉴딜정책을 주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제이콥 리스의 뒤를 이어, 미국에 갓 도착한 이민자들의 어리둥절한 모습이나 어린 근로자들의 고통스런 노역을 서사적인 영상으로 파헤쳐 전설적인 인물이 된 루이스 하인 (1874~1940) 의 작업도 1906년부터 14년까지 미국 국립아동근로위원회의 재정후원 덕분에 가능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이런 다큐멘터리 사진의 후원자였다.

그들은 사진이 국민계몽에 지극히 효과적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나치 독일이 건장한 남녀의 신체사진을 통해 게르만 인종의 전형을 제시하고 찬미했다.

또 전쟁을 극적으로 활용했다.

적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키고 끊임없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전쟁사진만한 것은 없었다.

나치가 전쟁사진을 어떻게 활용했든 전쟁사진이 처음 사진사에 등장했을 때는 차라리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띠었다.

최초의 종군사진인 1855년 크리미아 전쟁을 찍은 사진에는 어떤 참상도 담겨있지 않다.

당시 사진가들이 종군해 싸운 것은 부피만 크고 번거로운 구식 장비의 무게와 쾌청한 날씨를 기다려야하는 끝도 없는 지루함이었다.

실제 이 전장을 찍었던 장 샤를 랑글루아나 로저 팬튼의 사진에는 단 한 커트의 전투장면도 없었다.

초기 다큐멘터리 사진이 의도된 장면만을 담았건 말았건 간에 거기에는 지나간 시대가 담겨 있다.

날아가는 화살처럼 일직선 위를 흐르는 시간에 대해 사진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통해 한순간 순간의 현실을 꼼꼼히 채집한 것이다.

그래서 시대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진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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