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처럼 구름처럼 거스름 없이 살다 간 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6면

청명이 1986년 한림대 도서관에 써 준 『중용(中庸)』의 한 구절. 배움을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혹자는 그를 원칙주의자라 했다. 또 어떤 이는 자유주의자라고도 했다. 한학계의 거두 청명(靑溟) 임창순(1914∼99) 선생 얘기다. 10년 전 지병으로 타계한 그를 기리는 유묵전 ‘방랑연운(放浪烟雲) 청명 임창순’전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방랑연운’, 즉 ‘연기와 구름처럼 거스름없이 사는 삶’은 청명이 생전에 즐겨 찍었던 낙관의 문구다. 그의 삶도 그러했다. 제도권 학교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청명은 해방 후 중등교원 자격 시험에 합격해 중·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마흔 되던 1954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60년 4·19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과감히 떨쳐 일어나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 글씨를 직접 써 가두시위에 나섰다. 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대학에서 쫓겨났다. 63년 서울 종로 수표동에 ‘태동고전연구소’를 설립, 연인원 5000명에 이르는 한학연수생을 배출했다. 74년에는 경기 남양주시에 한국학 연구자들의 요람 ‘지곡정사(芝谷精舍)’를 세웠다.

한국학의 대부이며 서예사학자, 탁본수집가였던 그를 기리는 이번 전시에는 유족·제자 등 주변 인사들이 간직해 온 유품 120점이 모였다. 친필 ‘지곡서당’ 현판을 비롯해 한국의 명시·명문을 엄선해 적은 ‘청명 에디션’, 각종 금석문과 제발문을 모은 ‘학예일치’ 등이 전시된다. 특히 광개토대왕비 탁본 중 현존 최고(最古)의 판본으로 꼽히는 ‘광서기축본(光緖己丑本, 1889)’도 나왔다. 선생은 이를 통해 일본의 광개토대왕비 위변조설을 입증했다.

내용보다 조형에 초점을 둔 요즘 서예를 두고 ‘서예의 죽음’이라는 흉흉한 말이 거론되는 요즘, 학문과 예술이 합일된 청명의 삶과 글씨는 ‘서예 부활’의 해법이 될 수도 있겠다. 5월 10일까지. 02-580-1660.

권근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