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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쌓은 벽 속의 집, 투러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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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남부 푸젠성 융딩현 등 객가 집단 거주 지역에 세워진 투러우

담장 안쪽 모습.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적 용도가 강조된 거주 형태다.

소변을 본다고 할 때 쓰는 한자(漢字)가 ‘해수(解手)’다. 직접적인 뜻은 ‘묶인 손을 푸는 행위’다. 왜 이 단어가 소변을 본다는 뜻을 갖게 됐을까. 이 말은 인구 이동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전란과 재해를 피해 터전을 옮기기도 하지만, 왕조(王朝)의 필요에 의해 집단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가뭄과 기황으로 한 지역의 인구가 적어지면 당국은 다른 지역의 인구들을 대거 이동시켜 그 빈 곳을 채웠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관리들은 긴 줄로 굴비 엮듯이 사람들 손을 묶은 채 이동했다. 그러나 용변을 위해서는 단체로 손에 묶인 줄을 풀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중국 북부 지역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은 유비(劉備)와 조조(曹操)·손권(孫權)이 활동하던 위진(魏晋) 남북조 시기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이후 명(明)나라 초반 무렵을 전후해 다시 많은 사람이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했다. 광둥(廣東)과 푸젠(福建) 등 동남부 지역에 둥지를 튼 이들은 한국인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객가(客家)’라는 집단이다.

이들은 푸젠성 일대에 특이한 건축물을 지었다. 앞서 소개한 광둥 카이핑의 토치카식 주택 못지않게 이들이 지은 집은 외형이 성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이른바 ‘투러우(土樓)’라고 하는 집단 주택이다.

투러우는 집단 방어를 위해 몇 개 성씨(姓氏) 집단이 한데 뭉쳐 만드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여러 씨족사회가 성채 같은 투러우 안에 자리 잡고 함께 힘을 합쳐 살아 가는 형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성씨가 함께 사는 형태보다 단일 성씨 위주로 성채 주택이 지어졌다. 건축 규모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투러우 안에는 수백 명이 함께 거주하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 투러우는 네모난 형태, 즉 방형(方形)이 주축을 이뤘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서면서 원형(圓形)으로도 지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명대를 지나 청대(淸代)에 들어오면서 투러우의 각종 형식은 화려하면서 다양하게 발전했다.
전체적으로 투러우를 둘러싼 외벽 담의 기층 두께는 1.5~2m에 달하고, 높이는 일반 건물 4층 정도에 해당하는 10m 이상 짜리가 많다. 흙을 발라 지은 경우가 많지만 목조(木造)의 구조를 더해 견고함을 더했다. 대표적인 객가 집단 거주지인 융딩(永定)현에만 2만3000여 채의 투러우가 지어져 있다. 이는 유엔이 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했다.

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명대와 청대에도 이들이 성채 속에 몸을 감추고서 살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미 전회에서 소개한 각종 다툼 때문이겠다. 특히 이 지역에 늘 존재했던 ‘붕민(棚民)’의 존재도 당시 중국 사회가 불안정성을 수반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붕민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텐트촌 사람’이다. ‘붕’이라는 글자가 ‘시렁’을 우선 뜻하지만 뭔가 텐트처럼 설치한 가림막의 뜻도 지닌다. 이들 붕민은 인접한 지역으로부터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늘 이동한다. 텐트 같은 집을 지어 놓고 산에서 약초를 캐거나, 버섯을 재배하면서 생계를 꾸린다. 또 이런 붕민이 이동하면서 지역 내에서 물이나 토지 등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움도 많이 벌어졌다. 낮에는 양민(良民)이었다가 밤에는 도적으로 변하는 살벌한 사회적 환경 등도 투러우의 성채를 더욱 다지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그런 흔적들은 지명으로도 여전히 남아 있다. 투러우가 지어진 지역의 주변에는 유난히 요새를 뜻하는 ‘보(堡)’라는 글자와 성채를 뜻하는 ‘채(寨)’라는 글자를 단 지명이 많다. 투러우가 군사적 용도가 분명한 집단 주거지였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베이징에 널려 있는 사합원(四合院), 광둥 카이핑의 토치카식 주택, 성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푸젠의 투러우. 중국에서 ‘담’들은 이렇게 이어진다. 담 속에서 중국인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외부의 낯선 자들에 대한 경계가 확실할 테고, 그에 대한 방어 심리 또한 남다를 것이다. 중국인이 담을 사이에 두고 ‘나’와 ‘남’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문화적 유전자를 갖추고 있다면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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