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해낸다]8.'작은정부'가 경쟁력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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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영삼 (金泳三) 정부의 행정개혁을 담당해온 행정쇄신위원회를 이끌어온 박동서 (朴東緖) 위원장은 대선 직후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측으로부터 정부 개혁과 관련한 조언을 요청받았다.

朴위원장은 여기에서 "집권 6개월 내에 정부조직을 개편하겠다는 공약으로는 안된다.

정부조직 개편은 2월25일 집권 이전에 단행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개혁이 선행돼야 하고, 정부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선 정부조직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선진국들이 앞다퉈 정부개혁에 발벗고 나선 것은 정부의 효율적 운영 없이는 세계적 경쟁에서 선진국의 자리를 지킬 수 없는 탓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으로 성공한 뉴질랜드의 경우는 10년에 걸친 개혁으로 정부 경쟁력 세계 3위의 모범국으로 재탄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모범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앙공무원 수가 84년 8만8천명에서 96년 3만3천명으로 줄어들고, 지방정부가 8백여개에서 94개로 줄어드는 고통이 있었다.

미국 역시 빌 클린턴 정부가 출범하면서 '연방공무원 10만명을 줄이고 정부를 재창조 (reinvent) 하겠다' 며 행정개혁에 주력, 오늘날 미국경제의 유례없는 호황의 발판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선진국이면서도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일본 역시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정부가 국운을 걸고 '국가 개혁' 을 추진해왔으나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시모토 총리는 "몸을 불태워서라도 해내겠다" 고 다짐했지만 각종 압력단체, 특히 특정 부처를 대변하는 '족 (族) 의원' 들의 압력에 하시모토가 밀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정개혁은 불행히도 지금까지 뉴질랜드보다 일본을 닮아왔다.

어느 정권이나 '작고 효율적인 정부' 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공무원 숫자가 줄어든 적은 없다.

실제로 공무원이 해고된 경우는 80년 신군부에 의한 사회정화 차원의 숙정 당시 5천여명을 잘라낸 게 유일하다.

김영삼정부 역시 개혁을 주창하면서 공무원 수를 2만명 줄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4만8천여명이 늘어났다.

YS 행정개혁의 하이라이트인 재경원 탄생은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비난받고 있다.

임창열 (林昌烈) 경제부총리 스스로 인정했듯 재경원은 오늘의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를 초래한 1차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자리가 없어진 9백여명의 공무원중 공직을 떠난 사람이 없다는 것도 조직개편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재경원 소속 공무원중 보직없이 떠도는 '인공위성' 이 지난해 8월말 현재 1백52명이나 되는 사실은 실패의 현주소를 대변해준다.

金대통령이 외환 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경제정보의 보고창구가 재경원으로 집중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새로운 정부조직 개편과 행정개혁은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해선 안된다.

현재의 난국은 또다른 실패를 소화해낼 여력이 전혀 없다.

IMF 개방압력으로 세계경쟁에 노출된 상황에서 정부의 경쟁력은 국가경쟁력의 중추이며,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행정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호기 (好機) 다.

IMF체제는 위기의 징표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해내지 못한 우리의 개혁을 가능케 할 '고마운 외압' 일 수 있다.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이 집권에 성공한 것도 개혁에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여권 출신 대통령은 자신이 기대왔던 기득권 조직을 과감히 혁신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정부조직 개편의 목적은 단순히 부처를 자르고 붙이는 식의 모자이크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정부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재경원을 해체하고 예산기능을 총리실 산하로 옮기는 게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예산실 과장이 다른 부처의 사업을 좌우하는 부조리를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부처간의 밥그릇 다툼보다 철저히 기능과 효율성에 따른 개편을 해야 한다.

굳이 정부가 맡지 않아도 될 기능은 과감히 민간으로 이양함으로써 군살을 도려내야 한다.

조직 개편만으로 효율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공무원 스스로의 의식개혁도 병행돼야 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개발독재시대의 공무원상은 더이상 개방화.민주화된 21세기를 이끌어갈 수 없다.

군림하며 리더해온 공무원은 이제 세금을 내는 주인, 행정 서비스를 누릴 권한이 있는 고객인 국민에게 봉사하는 서비스 종사자가 돼야 한다.

정부조직 개편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당선자의 의지와 공무원들의 고통분담에 달렸다.

당선자의 말처럼 자신부터, 그리고 정부부터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을 보일 때 국민은 고통분담을 요구하는 정책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정부조직 개편은 IMF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국민 화합과 국가적 역량 결집의 첫 단추이기도 하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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