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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지능화하는 보이스피싱, 택시기사·금감원 사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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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꼼짝 마!” 2006년 11월 3일 서울 신당동의 한 여관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전화사기(보이스피싱) 조직원인 대만인 4명이 돈을 세다 잡혔다. 현금 4500만원과 대포통장 150여 개가 압수됐다. 석 달 동안 이 조직에 걸려든 피해자만 120여 명, 피해 금액은 10억원을 넘었다. 지금은 ‘보이스피싱 킬러’로 불리는 나석구(50) 반장이 보이스피싱의 실체를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서울 동작경찰서 수사과 지능1팀 전화사기 전담수사반 나석구 반장(경위·오른쪽에서 둘째)과 수사관들이 23일 전화사기단 조직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김승철 경사, 박규혁 경장, 박주식 경사, 나 반장, 송선영 경사. [김성룡 기자]


그로부터 2년6개월. 나 반장이 이끄는 서울 동작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보이스피싱전담반은 전국 최강의 팀으로 올라섰다. 이 팀이 2006년 이후 보이스피싱과 관련해 검거한 사람은 173명. 이들로부터 압수한 현금은 10억여원에 달한다. 서울지방경찰청이 올 2, 3월 실시한 보이스피싱 집중 단속기간에도 17명의 범인을 붙잡아 1위를 했다. 지난해 5월엔 그동안의 실적을 인정받아 일선 경찰서 중 처음으로 보이스피싱 전담반으로 지정됐다.

보이스피싱은 기업형 범죄다. 역할을 분담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전화로 관공서 등을 사칭하며 피해자를 현금지급기로 유인하는 ‘콜센터’, 돈을 이체받을 대포통장을 마련하는 ‘통장 모집책’, 돈이 이체되면 은행에서 이를 빼가는 ‘인출책’, 인출한 돈을 중국에 보내는 ‘자금관리책’ 등이다. 이들의 활동을 연결해주는 ‘연락책’이 가장 상부 조직이다. 적게는 수십 명부터 많게는 수백 명의 인원이 조직원으로 활동한다.

나 반장은 바로 이런 피라미드형 조직에 주목했다. “보이스피싱은 맨 위(연락책)를 잡지 않으면 끝없이 되풀이되는 범죄”라는 것이다. 경찰에 잡혀오는 이들은 대부분 노숙인을 이용해 대포통장을 만들거나, 일당을 받고 돈을 인출하는 ‘피라미’들이다. 나 반장은 ‘피라미’ 한 명이 잡히면 국내에서 활동하는 가장 윗선이 잡힐 때까지 수사를 계속한다. 2007년 11월에 잡혀온 통장 모집책을 물고 늘어져 11개월 동안 17명의 조직원을 차례로 잡아들였다. 이런 식으로 10여 명 이상의 조직원 검거에 성공한 사례가 세 건이다.

그가 보이스피싱을 전담하게 된 것은 피해자들의 눈물겨운 사연 때문이다. 부모를 여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전 재산 2000만원을 날린 여대생, 퇴직금 1억원을 뺏기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아주머니들이 “제발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피해자 중엔 나이가 많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많아요. 이런 사람들을 속이니 더 용서가 안 됩니다.” 빼돌린 돈이 대부분 중국·대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그가 분노하는 대목이다. “이런 국부 유출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초기엔 국세청·건강보험공단을 사칭해 “환급해 줄 세금(보험료)이 있다”고 속이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네댓 명이 조를 이뤄 사기극을 연출하는 신종 수법이 등장했다. 택시기사를 가장해 “카드를 주웠다”고 전화를 건다. “난 그런 카드가 없다”고 하면 “개인정보를 도용당한 것 같으니 경찰에 신고해주겠다”고 한다. 그 뒤 조직원들이 차례로 경찰관과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해 전화를 걸어 현금지급기 앞으로 유인하는 식이다.

수사를 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국내에서 검거된 범인들을 통해 중국에 있는 범죄자 이름과 연락처까지 파악했는데도 중국 공안에선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 같아선 달려가 잡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보이스피싱을 뿌리뽑기 위해선 외교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임미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전화 사기. 목소리(voice)로 인터넷 금융사기(phishing)와 비슷한 범죄를 벌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2006년 6월 첫 신고 이후 지난달까지 모두 1만6030명이 1621억원의 보이스피싱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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