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에 오른 특수활동비 … 영수증 처리 안 해도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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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특수활동비’가 도마에 올랐다.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청와대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나면서다. 검찰에 따르면 정 전 비서관은 2005년 2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억5000만~3억원씩 빼내 차명계좌로 입금시켰다. 총무비서관이 청와대의 곳간지기라 해도 일반 예산이었다면 이렇게 상습적으로 거액을 빼돌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특수활동비는 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묻지마 예산’이기에 횡령이 가능했다.

◆특수활동비 뭐가 문제=기획재정부의 ‘예산안 작성 세부지침’에 따르면 특수활동비는 “기밀 유지가 요구되는 정보 및 사건수사, 이에 준하는 국정 수행 활동 등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로 분류된다. 특수활동비의 사용내역 증빙 서류는 감사원의 ‘특수활동비 계산증명지침’에 따라 작성한다. 그런데 이 지침에 따르면 특수활동비의 사용처를 공개할 경우 경비 집행의 목적 달성이 방해 받는다고 판단하면 집행내용확인서를 내지 않아도 된다. 수령자 서명만 있으면 어떻게 썼는지 보고를 안 해도 된다는 말이다.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때도 특수활동비는 부처별 총액으로만 편성하고 세부 내역은 비밀로 한다. 의원들이 속사정을 감시할 수 없는 구조다. 흔히 ‘판공비’로 불리는 업무추진비는 지출 내역을 남겨야 한다. 하지만 특수활동비는 그런 의무도 비껴가니 공무원 입장에서 이보다 더 편한 쌈짓돈이 없다.

올해 정부의 특수활동비는 지난해보다 115억원 늘어난 8624억원이다. 2000년 4730억원에서 꾸준히 증가세다. 예산 전체가 특수활동비로 묶인 국정원(4860억원)과 경찰청(1269억원)의 비중이 크다. 청와대의 특수활동비는 221억원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청와대의 특수활동비는 216억원 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민주당의 한 의원은 23일 “특수활동비는 대통령의 행사 격려금, 경조사비 등으로 쓰였으며 대개 총무비서관이 다 처리했다”며 “영수증 처리를 안 해도 되니 마음만 먹으면 횡령하기 가장 쉬운 돈일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 있었던 한 인사는 “가끔 직원들 계좌로 활동비 명목으로 50만~100만원 정도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특수활동비에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민정수석실에서 잠복근무를 하거나 ‘비밀 출장’을 나갈 때도 그런 돈이 쓰인다고 한다.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은 특수활동비를 경조사비, 군부대 격려금, 장관 전별금, 복지시설 금일봉 등에 썼으며 본인이 직접 돈을 만진 건 아마 휴가지인 청남대 경비 관계자들에게 건넨 수고비가 전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때 특수활동비가 한 달에 10억원 정도 됐는데 늘 빠듯하더라. 정상문씨는 어떻게 아껴서 돈을 남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안은=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해 10월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에게 제출한 ‘특수활동비 집행현황과 개선책’에서 “특수활동비의 세부 집행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어 재정 운용의 투명성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산정책처는 현재 포괄적인 특수활동비의 범위를 사건수사비·안보활동비·정보수집비 등으로 세분화하고 대외보안이 필요한 특정 업무는 성격과 유형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이정현 의원은 “특수활동비의 불투명성을 제거하자는 주장은 한나라당이 야당 때부터 꾸준히 제기해 온 사안”이라며 “차제에 국회가 특수활동비의 사용내역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대 하승수(법학) 교수는 “일차적으로 특수활동비의 규모를 줄여나가야 하며, 영수증을 못 받는 경우에도 담당공무원이 어떤 용도로 썼는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 나중에 감사원이 지출의 적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정하·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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