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북 제안, 입주 기업 의견 수렴 뒤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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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특혜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북한의 ‘기습 제안’을 놓고 정부가 숙고를 계속하고 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22일 국회에서 북한의 개성공단 임금 인상, 임대료 지급 요구에 대해 “현대아산 및 공단 입주 기업들의 의견 수렴을 통해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통일부의 숙고 배경엔 북한이 예상과 달리 다음 접촉 날짜를 잡자며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작용했다. 그간 당국 간 대화 거부 자세에서 벗어나 후속 회담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북한이 21일의 개성 접촉 때 읽어 내려간 통지문에서도 북한의 속내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 공단 폐쇄와 같은 파국보다는 목적이 실리 챙기기에 있음이 엿보인다.

북한은 통지문에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문제를 비판했지만 주안점은 개성공단에 뒀다. 북한은 “군사적으로 예민한 분계 연선(분계선)에 개성공업지구를 헐값으로 내줬다”며 “남측 기업은 개성에서 한 해 수억 달러의 이익을 내고 있지만 우리 4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로 3000만 달러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개성에서 얻는 게 거의 없고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다. 우리만 손해를 보는 조건”이라고 했다.

또 “북남 관계가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성 사업만은 유지되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남측 당국은 우리 진심을, 돈에 목이 매어 개성을 깨지 못하는 듯이 왜곡 선전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개성 사업이 원만히 추진되도록 성의와 노력을 다하겠지만 (그래도 잘 안 된다면) 후과(결과)는 남측에 책임이 있다”고 압박해 왔다.

정부로서는 고민스럽다. 북한의 제의에 덜컥 응하자니 입주 기업들의 사업성 악화가 심각해진다. 북한에 밀려 ‘퍼 주기’에 나선다는 여론의 비판도 예상된다. 이미 합의된 문서를 백지화하게 돼 향후 남북 경협에 나쁜 선례로도 남는다.

반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기엔 부담도 여전하다.

북한이 이를 핑계로 개성공단 통행 재차단이나 입주 기업 ‘불법행위’ 조사 등으로 ‘공단 고사 작전’에 나서며 책임을 남쪽에 돌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의 제의를 역이용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고 나올 전기로 삼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대목이다. 북한에 억류된 남측 직원 유모씨의 석방을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일단 신중한 검토를 거쳐 후속 접촉에 응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의 제의를 수용하는 차원이 아닌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 차원에서다.

한편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2일 “국군이 군사분계선상의 표식물을 북한 쪽으로 수십m 옮겨 꽂는 엄중한 도발 행위를 했다”며 “이는 정전협정 위반으로 원래 위치로 옮기지 않으면 자위적 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합참 관계자는 “북한이 주장한 표식물(제0768호)은 북한이 관리하는 것으로 우리는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PSI 참여, 다음 남북 접촉 이후 될 듯=정부는 PSI 참여 시기 결정은 당분간 늦추려하고 있다. 당장 PSI 참여를 선언하면 북한과 대화 창구가 닫힐 수 있고, 계속 참여를 미루면 국내 보수층이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복수의 청와대 관계자는 22일 “PSI 참여 원칙엔 변함이 없다”면서도 “다만 최종 결정은 일단 다음 남북 접촉 이후로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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