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4>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③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전쟁 후 끼니를 거르며 살던 때였지요. 하루는 아이가 ‘환한 밥! 환한 밥!’ 하면서 우는 거예요. 제 처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쌀밥이 먹고 싶다는 거래요. 아직 말을 잘 몰라서 꽁보리밥을 깜깜한 밥, 흰 쌀밥을 환한 밥이라고 했던 거죠.” 그러고는 안경을 벗어 눈물을 닦더니 그 기업인은 말을 이었다. “아이가 병으로 죽고 난 뒤늦게서야 형편이 피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면 뭘 합니까. 쌀밥이란 말도 모르고 죽은 애에게 돈을 얼마를 벌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한 맺힌 가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어 왔다. 그런데도 한 기업인의 말에 눈시울을 적셨던 것은 쌀밥을 ‘환한 밥’이라고 했다는 그 대목에서였다. 쌀밥과 보리밥을 빛과 어둠으로 비유한 천재적인 유아언어(幼兒言語)에서 나는 어느 명시 못지않은 진한 감동을 받았다. 시인이란 커서도 세 살 때 말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아언어의 소구력이 얼마나 큰지는 오바마의 선거전에서도 나타난다. 오바마란 이름은 힐러리 클린턴이나 매케인처럼 까다롭지가 않아 젖먹이 애들도 따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이용해 오바마라고 말하는 젖먹이 애들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 것이다. 귀엽고 신기한 장면은 호기심을 유발하여 하루에도 비슷한 동영상이 수백 건씩 늘어나고 내려받기 수는 기하급수로 폭발해 쓰나미 효과를 일으켰다.

유아어의 특성은 오바마의 이름처럼 단순한 모음, 그리고 구순음 같은 것들로 구성된다. 나라마다 언어가 다른데도 엄마·아빠의 어린이 말은 에스페란토와도 같다. 우리의 ‘엄마’와 ‘맘마’는 세계 어디에서나 번역할 필요 없이 ‘마마’ ‘마미’ ‘마망’으로 통한다. 거의 모두가 ‘M’ 계열의 부드러운 구순음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는 ‘P’ 계열의 강한 파열음으로 인도유러피아의 조어(祖語)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아파(appa)’다. 거기에서 영어의 ‘파더’, 독일어의 ‘파데르’, 프랑스어의 ‘페르’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유아어란 의미 이전에 소리만으로 어느 대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일종의 태생적 배꼽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배꼽 친구처럼 그것이 커서도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 ‘오노마토피어’라고 하는 의성어다. 언어학자들은 이 의성어가 가장 발달한 말로 한국어를 꼽고 있다. 일본 학습원대학의 시타미야(下宮忠雄) 교수가 조사한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각국어로 번역한 것을 비교해 보면 의성어가 영어 역에서는 6개, 독일어에는 7개, 프랑스어는 3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어 번역에는 무려 34개나 등장한다. 실제 조사 자료는 없지만 우리가 일본보다 의성어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일본어로 코고는 소리는 “스야스야” 정도지만 한국어로는 “색색”과 “콜콜”, 어른이면 “쿨쿨”과 “드렁드렁”, 그것도 모자라면 “드르렁 드르렁”이다.

한국의 의성·의태어는 반드시 ‘ㅗ’ ‘ㅏ’ 양모음과 ‘ㅓ’ ‘ㅜ’의 음모음이 짝을 이루는 모음조화의 법칙으로 구성된다. 가령 쌀밥과 보리밥을 빛으로 나타낼 경우 쌀밥에 보리가 조금 섞이면 ‘환한 밥’은 ‘훤한 밥’이 되고 꽁보리밥에 흰쌀이 들어가면 ‘깜깜한 밥’은 ‘껌껌한 밥’이 된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깃발은 팔랑팔랑 휘날리고, 설렁설렁 불면 그것은 펄럭펄럭 나부낀다. 그래서 수돗물이 나오다 끊어지는 물줄기를 6단계로 표현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는 없을 것이다. 콸콸 흐르던 물이 좔좔로, 좔좔에서 줄줄로, 줄줄에서 졸졸로 물줄기가 점점 줄어든다. 그러다가 ‘ㄹ’ 받침이 ‘ㄱ’으로 바뀌어 조록조록이 되면 물줄기가 끊어지기 시작하고, 조로록 조로록으로 변하면 수돗물은 곧 끊길 것이다. 모음조화만이 아니라 자음조화까지 거들어 흐르는 물에는 ‘ㄹ’이 붙고, 막히고 끊기는 것엔 ‘ㄱ’ ‘ㄲ’의 폐색음이 따른다. 힘을 줘야 나오는 대변은 “끙가”인데 어른이 되어도 힘주어 일할 때에는 “끙끙거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의 성공법칙으로 꿈, 깡, 꾀, 끼, 꼴, 끈의 쌍기역 시리즈는 모두가 끙가의 배꼽 친구였던가 보다.

깜깜한 보리밥을 먹던 한국인들이 환한 쌀밥을 먹게 되고 앞이 깜깜하던 날들이 점점 훤하게 밝아지며 환한 날을 맞게 된다. 그 다이내믹 코리아의 원천적인 힘이 바로 그 세 살 때 배꼽말 속에 있었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이어령


[연재]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5>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④ 너희들이 물불을 아느냐

→한국인 이야기 <14>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③ 유아 언어 속에 담긴 힘

한국인 이야기 <13>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② 모든 것은 셋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인 이야기 <12>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① 공자님만 알았던 세 살의 의미

한국인 이야기 <11> 돌상 앞의 한국인 ⑤ 돌잡이는 꿈잡이

한국인 이야기 <10> 돌상 앞의 한국인 ④ 어머니 어깨너머로 본 세상

한국인 이야기 <9> 돌상 앞의 한국인 ③ 따로 서는 아이와 보행기 위의 아이

한국인 이야기 <8> 돌상 앞의 한국인 ② 기저귀로부터 오는 문화유전자

한국인 이야기 <7> 돌상 앞의 한국인 ① 나를 지켜준 시간의 네 기둥

한국인 이야기 <6> 탄생의 비밀 (끝) '만인의 친구' 미키마우스는 배꼽이 없다

한국인 이야기 <5> 탄생의 비밀 ⑤ 한국인은 한 살 때 태어난다

한국인 이야기 <4> 탄생의 비밀 ④ 왜 울며 태어났을까

한국인 이야기 <3> 탄생의 비밀 ③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한국인 이야기 <2> 탄생의 비밀 ② 쑥쑥이는 외계인이 아니다

한국인 이야기 <1> 탄생의 비밀 ① 산불과 비숍

한국인 이야기 "나는 왜 지금 ‘한국인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가"

☞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섹션 바로가기